‘물 위에 씌어진’ 펴낸 시인 최승자… 정신병동 안, 끝까지 부둥켜안은 詩는 그를 닮아 간명했다
입력 2011-07-13 17:41
한국 현대 여성시의 대표 시인 최승자(59)가 다시 돌아왔다. 지난해 초, 유일한 혈육인 외삼촌의 주선으로 경북 포항의 한 정신병동을 오가며 유언처럼 쓴 시집 ‘쓸쓸해서 머나먼’으로 주목받았던 그가 이번엔 경기도 이천의 가톨릭 단체에서 운영하는 한 정신과 병동에 입원한 상태에서 일곱 번째 시집 ‘물 위에 씌어진’(천년의시작)을 냈다.
전작이 병중(病中)의 노래이자 신음에 가까웠다면 이번 시집은 자신의 자아를 찾아 떠난 긴 여행자의 슬픈 어깨에 얹혀져 있는, 표독이 제거된 시편들을 선보인다. 시인은 시집 맨 앞에 이렇게 적었다. “이 시집의 시들 전부가 정신과 병동에서 씌어진 것들이다. 독자들은 갑자기 튀어나오는 신(神), 신(神)할애비 등에 놀랄 수도 있겠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는데 자세한 얘기는 할 수 없고, 노자와 장자를 계속 읽다가 마주치게 된 기이한 우연이라는 말만 더 보태자.”(‘시인의 말’)
키 149㎝, 체중 34㎏인 그는 극심한 불면증과 정신분열증세를 앓으면서도 시만큼은 버리지 않았다. 바람이라도 불면 힘없이 넘어지고 말 가벼운 육체에서 툭툭 떨어지는 그의 시어들은 시집 제목처럼 물 위에 씌어지고, 물 위에 띄울 수 있을 만큼 간명한 것이 특징이다.
“꿈인지 생시인지/ 사람들이 정치를 하며 살고 있다/ 경제를 하며 살고 있다/ 사회를 하며 살고 있다// 꿈인지 생시인지/ 나도 베란다에서/ 화분에 물을 주고 있다// (내 이름은 짧은 흐느낌에 지나지 않았다/ 오 명목이여 명목이여/ 물 위에 씌어진 흐린 꿈이여)// (죽음은 작은 터널 같은 것/ 가는 길은 나중에 환해진다)”(‘물 위에 씌어진 3’ 전문)
그는 이 욕망의 거리에서 한참 비켜서서 그저 베란다의 화분에 물을 주는 짧은 흐느낌만으로도 충분히 자신의 존재를 느끼고 있다. 저 표독스러운 시대였던 1980년대를 통과하며 보여주었던 언어의 독기를 완전히 제거한 채 언젠가는 폐허로 남을 문명의 파편들을 작은 손으로 하나씩 만져보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말이 줄어들고 문장은 짧고 단순해졌다. 아니, 그는 자신 안에 말이 줄어들고 있는 것을 빤히 지켜보고 있다.
“세상이 펼쳐져 있는 한/ 삶은 늘 우울하다// 인생은 병이라는 말도 이젠 그쳤고/ 인간은 언어라는 말도 이젠 그쳤고// 서서히 말들이 없어진다// 저 혼자 깊어만 가는 이상한 江/ 人類// 어느 누가 못 잊을 꿈을/ 무심코 중얼거리는가/ 푸른 하늘/ 흰 구름 한 점/ (사람이 사람을 초월하면/ 자연이 된다)”(‘서서히 말들이 없어진다’ 전문)
언어의 경제학은 이번 시집의 내성이자 특징이기도 하다. 이는 쇠약해진 육체의 감각을 가장 경제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스스로 체득한 데 기인한다. 초경량의 몸과 초절제의 언어. 최승자는 육체와 언어를 따로 구별할 필요가 없는 어떤 정신적 체험을 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그러니까, 가볍고 가벼워서 허공으로 날아가기 직전의 말들을 겨우 붙들어 매고 있는 게 이번 시집인 것이다. 마치 조난자가 외딴 무인도에서 보내는 SOS 신호음처럼.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황현산은 “가장 가벼운 육체로, 가장 잘 활용된 감각으로, 간명한 사상으로, 경제적으로 우리 시대에 가장 투명한 말의 거울을 만들었다”며 “제 입김으로 거울을 흐려 놓지 않으려면, 호흡을 가다듬으며 이 시집을 읽어야 한다”고 말했다.
정철훈 선임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