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조미자] 주머니 속의 생물
입력 2011-07-12 18:04
학생들이 예능발표대회를 한다기에 시청각실로 갔다. 무대의 그랜드 피아노에서 맑은 음색이 창틈으로 퍼져나간다. 음악도 살아 움직이는 걸까? ‘이 피아노 소리를 나 혼자 들어서는 안 되는데.’ 나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심정이 되어 눈을 창 너머로 돌렸다.
달포 전이었다. 회청색 낡은 점퍼를 입은 노인이 사무실에 들어섰다. 얼굴은 갸름하고, 몸도 야위었으나 눈만은 형형했다. 모든 내핵이 눈에 들어있는 듯했다. 전통이 오래된 학교여서 나는 곧 동문의 한 사람이려니 예감했다. 그는 2년 전 자신이 이 학교에 피아노를 몇 대 기부한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그날 스탠퍼드 부부를 떠올렸다. 그들은 재산을 유익한 일에 쓰려고 하버드 대학을 방문했다. 총장을 만나겠다는 말에 수위는 허름한 옷차림을 보고 총장님은 댁들을 만날 시간이 없을 거라고 했다. 그들은 대학교를 설립하는 데 얼마가 드는지 물었으나 수위는 무시했다. 마음에 상처를 받은 부부는 서부에 직접 스탠퍼드 대학을 설립했다.
그는 하늘이 낸 부자는 못 돼도 부지런히 살아 작은 부자는 된 것 같다며 눈가의 주름살을 모으며 웃었다. “기부를 하면서 갈등은 없었나요?” 내가 물었다. 그는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일기를 45년간 써왔다며, 모든 문제는 일기를 쓰면서 해결되었다고 한다. 어떻게 생을 마감할 것인가?
문제의 원인부터 쓰기 시작하면 일기의 끝 문장에는 해결책이 나왔다고 한다. 그리고 부끄러운 듯 아내 말을 꼭 듣는다고 했다. 남자와 여자의 보는 관점이 달라 아내의 말을 들으면 후회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아내를 부를 때 ‘복덩어리’라고 불렀다. “어이, 복뎅이” 하면 다른 사람들은 누구를 부르나 하다 이내 집사람인 줄 알고는 헛웃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한국 부자들의 특성을 연구한 결과를 보면 그들은 아내를 존중하고, 겨울에 태어났으며 붉은색을 선호한다는 등등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는 이미 명리학에서는 재물을 부인과 여자로 본다는 것을, 복과 지혜를 갖춘 아내의 말을 들으면 부자가 된다는 걸 실증한 셈이다.
아는 선배가 나더러 골프를 왜 안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돈이 많이 들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그러자 그는 저 세상 갈 때 금관을 쓰고 갈 거냐며 “돈은 생물이야” 하고 면박을 주었다. 그 소리를 듣자 나는 피아노를 기부한 노인을 떠올렸다. 돈이 생물임을 이미 알아차리고 그 돈이 이렇게 어린이들의 미래를 위해 푸르게 살아 움직이는 것을 그는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회가 끝난 후 나는 텅 빈 시청각실로 들어갔다. 피아노 뚜껑을 열고 서툰 솜씨로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의 마지막 악장 ‘환희의 노래’를 쳤다. “찬양하라 노래하라 창조자의 영광을/ 뻗어나는 나무들은 쉬지 않고 자란다/ 봄비 내려 새싹 트는 나무순을 보려마/ 햇볕 받아 웃음 짓는 꽃봉오리 보려마.” 일흔 살이 되면 자서전을 내겠다며 환하게 웃던 그의 얼굴이 건반 위에 어른거렸다.
조미자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