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의 학살자들… 그들은 왜 그토록 당당할까

입력 2011-07-12 21:45


지난달 27일 캄보디아 프놈펜에 위치한 캄보디아 특별재판소(ECCC) 법정에서 역사적인 전범(戰犯) 재판이 열렸다. ‘20세기 최악의 학살’로 알려진 캄보디아 ‘킬링필드’의 핵심인사 4명에 대한 재판이 32년 만에 시작되는 날이었다. 세계 곳곳에서 집단 학살의 책임을 묻는 전범 재판이 이뤄지고 있다. 언론들은 “크메르루주 정권에 대한 단죄는 반(反)인륜범죄를 처단하는 데 공소시효가 없다는 ‘정의(正義)’의 실현을 보여준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과연 세계는 ‘정의’에 한 걸음 더 다가가고 있는 것일까?

◇당당한 학살자들=ECCC 법정에 모습을 드러낸 피고인들은 크메르루주 정권의 2인자였던 ‘브라더 No.2’ 누온 체아(85) 전 공산당 부서기장, 이엥 사리(85) 전 외무장관, 이엥 티리트(79) 전 내무장관, 키우 삼판(79) 전 국가주석 등 4명이었다.

ECCC는 지난해 9월 이들을 집단학살, 종교 박해, 고문 등의 혐의로 기소했다. 폴 포트가 크메르루주 정권을 이끌던 1975년∼1979년 사이 캄보디아에서는 최소 170만명이 학살당했다. ‘안경을 썼다, 손이 하얗다’는 이유로 양민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지만, 이들은 당당했다. 트레이드마크인 선글라스를 쓰고 나온 누온 체아는 “재판이 불공정하다”며 법정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이엥 사리는 자신은 이미 특별 사면을 받았다며 “이 재판은 일사부재리 원칙에 위배된다”고 주장했다.

보스니아 내전 당시 집단학살을 저지른 혐의로 지난 5월 16년 만에 붙잡혀 국제유고전범재판소(ICTY)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라트코 믈라디치(69) 전 세르비아계 군사령관도 당당하기는 마찬가지다. 지난 4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2차 공판에서 믈라디치는 재판장에게 “당신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다. 내 방어권을 보장하라”며 세르비아어로 소리쳐댔다.

국제형사재판소(ICC)가 2008년 현직 국가원수로는 처음 체포영장을 발부한 수단의 오마르 알 바시르 대통령은 지난달 28일 중국을 국빈 자격으로 방문했다. 알 바시르 대통령은 수단 다르푸르 내전에서 약 30만명의 민간인 학살을 묵인, 지원한 혐의로 기소된 국제적인 수배자다. ICC가 지난달 27일 체포영장을 발부한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 역시 “ICC는 나를 체포할 권리가 없다”면서 큰 소리를 치고 있다.

◇인정 받지 못하는 국제 질서=반 인륜범죄를 처단하겠다는 국제사회의 의지가 분명함에도 전범 재판이 열리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이유는 무엇이며, 이들은 왜 이토록 뻔뻔스러울까.

이유는 다양하다. 우선 관련국들의 비협조적 태도가 자리잡고 있다. 누온 체아 등 4인방은 2007년에야 체포됐다. 자신도 크메르루주 정권에서 일했던 전력이 있는 훈 센 총리가 “과거는 묻어야 한다”면서 재판소 설립 및 진행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유엔은 캄보디아 정부와 10여년에 걸쳐 협상을 한 끝에야 2006년 ECCC를 설립할 수 있었다. 이번 재판을 열기 위해서 다시 5년의 세월을 투자했으며, 1억 달러 이상의 비용을 투입해야 했다.

해당 국가 내에서 범죄자를 비호하는 세력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점 역시 전범 재판이 진행되는 과정에 있어 걸림돌 중 하나다. 믈라디치는 16년간 세르비아 민족주의가 강한 북부에서 숨어 다녔다. 그가 체포되자, 세르비아 강경 민족주의자들은 “믈라디치는 영웅”이라며 시위를 벌였다.

무엇보다 전범들은 국제사법기구에 의한 처리가 승자의 범죄를 정당화하기 위한 도구로 악용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ICTY에서 재판을 받다가 2006년 사망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전 유고연방 대통령은 “전범재판소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 유고에 행한 범죄를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심리에 응할 수 없다”고 버텼다.

미국과 이라크의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은 처벌받지 않고, 패배한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만 교수형에 처해졌다는 것 역시 이런 논리를 방증하는 사례로 쓰인다. 범죄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패배자이기 때문에 재판받는다는 것이다.

아프리카연합(AU) 53개 회원국도 지난 1일 “카다피에 대한 체포영장 집행에 협조하지 않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장 핑 AU 집행위원장은 “ICC는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등에서 서방 국가에 의해 행해진 범죄는 무시하면서 아프리카에서 행해진 범죄만 쫓고 있다”고 지적했다.

어떤 국제사법기구도 절대적 강제력이 없다는 점 역시 전범 처리가 늦어지는 이유 중 하나다. 결국 가족과 이웃을 무차별하게 학살한 이들이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큰 소리를 치는 상황에서 애가 타는 것은 피해자들뿐이다. 믈라디치의 재판을 지켜본 내전 피해자 중 한 사람은 “우리는 믈라디치가 한 짓으로 고통 받았고, 울며 세월을 보냈다”면서 “우리는 그가 했던 짓 그대로를 그에게 돌려주길 원한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그의 서커스를 보고 있다”며 분개했다.

양지선 기자 dybs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