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신학강좌] 예수는 누구인가

입력 2011-06-26 17:34


(51) 순정을 넘어서

마음이 곱고 착하고, 정 많고 미더운 것처럼 귀한 게 없다. 그게 순정이다. 순정에 감동받지 않는 사람은 없다. 모든 종류의 휴머니즘을 파고들면 한가운데 순정이 있다. 시, 소설, 영화, 신화, 다큐 같은 것이 우리에게 주는 감동의 저변에도 마찬가지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본능적 순정이요 남녀의 사랑은 어쩔 수 없는 순정이다. 우정은 동무의 순정이며 신념은 동지적 순정이다. 사람을 움직이는 인식과 판단, 행동은 마음에서 나오는데, 무릇 모든 순수한 마음의 상태를 순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순정이 뚫지 못할 장벽은 없고 순정에 풀리지 않을 오해가 없다.

부활은 순정의 논리가 더 이상 길을 찾지 못하는 데서 발생했다. 마가복음 16장은 두 덩어리로 나뉜다. 1∼8절 그리고 나머지다. 첫 번째 덩어리의 내용 흐름에서 3절과 4절 사이에 단절이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신 뒤부터 전면에 등장하는 여인들의 순정은 15장 뒷부분에서 시작해 16장으로 이어진다. 그게 3절까지다. 사랑하는 주님이 죽지 않도록 지킬 수는 없었고 돌아가신 분을 살려낼 수는 없었지만, 순정은 시신에 향품이라도 발라드려야 했다. 3절까지는 순정의 흐름이 자연스럽다. 안식일이 끝나자마자 세 여인이 향품을 사다둔다(1절). 안식 후 첫날 새벽 동이 틀 무렵 순정의 여인들이 무덤으로 간다(2절). 가면서 무덤을 막아놓은 큰 돌을 어떻게 굴릴까 걱정한다(3절).

4절에서 상황이 급변한다. 무덤에 가보니 큰 돌이 벌써 굴려져 있다. 무덤에 들어가니 시신은 보이지 않는다. 여인들의 가슴이 쿵쾅거린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무덤 속에서 여인들이 만난 것은 주님의 시신이 아니라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었다. 얼마나 놀랐을까! 청년 그러니까 천사인데, 이렇게 말한다. 6절이다.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사랑하는 주님이 살아나신 것이다! 그러면, 여인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즉시 기뻐해야 하지 않을까. 천사가 지시한 대로 제자들에게 가서 이 소식을 전하며 감격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여인들은 그러지 않았다. 아니, 그러지 못했다. 8절을 보라.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시신 대신 부활 소식을 전하는 천사를 만난 뒤 곧 기쁨과 감격에 휩싸였으리라는 것은 완성된 성경 본문을 읽는 독자들 입장이다. 기독교 신앙에서 부활이라는 것을 친숙하게 알고 믿고 있는 사람들 입장이다.

여인들에게 또 당시 다른 사람들에게도 부활은 낯선 것이었다. 전혀 경험하지 못했고 상상하지도 못했던 것, 아주 낯선 그래서 두렵고 떨리게 만드는 것이었다. 시신 대신 들은 부활 소식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만드는 사건이었다.

부활이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부활은 전적으로 하나님에게서 일어났다. 사람 사는 세상에서 넘지 못할 것이 없고 풀지 못할 것이 없는 순정도 더 이상 가지 못하는 곳, 순정을 훌쩍 넘어선 곳에서 일어난 것이 부활이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다. 그리고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부활절 말고 부활 사건이 있었던 그 처음에, 상황이 우선은 그랬다.

지형은 목사(성락성결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