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정상회담 유혹 참을 수 없는 협상의 가벼움… MB 정부, DJ·노무현과 무엇이 달랐나
입력 2011-06-23 18:06
우리나라 대통령들에게 남북 정상회담의 유혹은 매우 강하다.
재임 중 북한 지도자와 손을 맞잡는 ‘대역사’를 성사시키면 한반도 평화 분위기 조성은 물론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엄청난 파급 효과를 가져 올 수 있다.
정상회담이 임기 말에 열리면 레임덕을 늦출 수도 있다. 정상 간 만남의 대가로 막대한 경제적 지원을 북한에 약속하는 데 별 부담을 느끼지 않는 이유다.
남북 정상회담 추진 움직임은 김영삼 대통령 때부터 대담해졌다. 김 전 대통령은 1993년 2월 취임사를 통해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나을 수는 없다”고 했다. 남북관계에 가중치를 두겠다는 뜻이다. 한·미관계에 갈등 기류가 조성된 것은 물론이다. 북핵문제로 한반도 정세가 불안해지자 김 전 대통령은 “핵무기를 가진 상대와는 악수할 수 없다”고 한 발 빼는 듯한 발언을 했다. 이렇듯 미국과 북한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던 김 전 대통령은 1994년 한반도 위기 극복을 명분으로 김일성과의 정상회담을 밀어붙여 합의에 도달했다. 이 합의로 한반도는 순식간에 대화모드로 접어들었다.
김영삼 정부는 정상회담 때 북한에 줄 선물까지 준비했다. 함경북도 원정리와 나진항을 잇는 도로를 직선화하고 확장과 포장을 지원한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김 전 대통령은 도로 준공에 맞춰 ‘평화대로’라는 휘호까지 마련했다. 하지만 김영삼-김일성 회담은 불발됐다. 7월 25일로 예정됐던 정상회담을 불과 20여일 앞두고 갑작스럽게 김 주석이 심장질환으로 숨진 것이다.
비밀접촉을 통해 김대중 전 대통령이 2000년 사상 처음으로 김정일과 정상회담을 가진 데 이어 노무현 전 대통령도 비밀접촉을 거쳐 2007년 김정일과 회동했다.
이명박 대통령 역시 남북 정상회담을 비밀리에 추진했다. 북한 조선중앙통신에 따르면 지난 4월 김천식 통일부 정책실장과 홍창화 국가정보원 국장, 김태효 청와대 대외전략비서관이 북한과 접촉했다. 우리 측은 당시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사건을 거론하지 않겠으니 정상회담을 위한 비밀접촉을 갖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그리고 6월 하순 판문점에서의 정상회담, 8월 평양에서의 2차 정상회담, 2012년 3월 서울에서 열리는 핵안보정상회의에서의 3차 정상회담을 개최하자고 했다. 하지만 5월 9일 접촉에서 우리 측 대표들이 천안함 폭침 사건에 대한 사과를 고집해 협상이 깨졌다는 게 북측 주장이다. 정부는 “천안함 피폭과 연평도 폭격사건 사과를 받기 위한 접촉이었지 정상회담 논의는 없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설득력이 떨어진다. 무리하게 김정일을 만나려다 망신만 당했다는 의견이 많은 게 현실이다.
청와대가 전면에 나선 MB 정부
남북 정상이 만난 2000년, 2007년과 이명박 정부에서의 정상회담 추진 과정에는 사소해 보이지만 간과할 수 없는 차이점이 있다.
1, 2차의 경우 대통령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는 최측근이 북한과 접촉해 북한 의사를 확인한 뒤 국정원이 실무협상을 뒷받침하거나 전면에 나서 성사시키는 구조로 돼 있다. 임동원 전 국가정보원장의 회고록 ‘피스메이커’에 따르면 1차 정상회담은 2000년 2월 2일 당시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이 현대그룹 이익치 회장과 친북 일본인 요시다 다케시로부터 북한의 정상회담 추진 의사를 전달받으면서부터 시작됐다. 국정원은 임 원장이 2월 3일 대통령 주례보고를 하기 전까지 북한의 비밀접촉 제의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이후 박 장관과 송호경 아태평화위원회 부위원장 간 실무 협상과정에서 국정원 출신인 서훈, 김보현이 참여하면서 국정원은 정상회담 개최를 위한 실무작업에 관여하게 됐다.
김정일은 정상회담 당시 “박지원 장관이 나왔다기에 김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직접 추진하는 것으로 생각했다”고 말했다. 대통령 최측근이 나서 수락했다는 얘기다.
2차 정상회담 관련해선 노무현 전 대통령 최측근인 안희정(현 충남지사)씨가 맨 처음 동원됐다. 안 지사는 2006년 10월 베이징에서 북한 민족경제협력연합회 이호남 참사와 정상회담에 관한 의견을 나누었다. 문재인 전 청와대 비서실장은 회고록에서 “북한이 정상회담 의사타진을 해와 노 대통령이 진의파악을 위해 안 지사를 보냈다”고 했다. 하지만 안 지사의 접촉이 2차 정상회담 개최에 큰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그해 11월 취임한 김만복 국정원장이 정상회담을 주도했다. 김 원장은 2007년 7월 김양건 통일전선부장과 고위급 접촉을 가졌다. 북한은 8월초 김 원장을 평양으로 두 차례 초청해 정상회담 논의를 진전시켰다. 김 원장은 평양행에 앞서 공관에 있는 벼락 맞은 나무를 붙잡고 협상 성공을 기원했다고 한다.
반면 이명박 정부에서는 국정원이나 대통령 최측근이 아닌 청와대 인사(김태효 청와대 대외전략비서관)가 협상 테이블에 직접 앉았다. 역대 정부와 다른 점이다. 문정인 연세대 정외과 교수는 “남북 정상회담을 위한 실무협상을 하면서 청와대가 전면에 나서는 경우가 어디 있느냐”며 “협상에 실패할 경우 위험부담도 모두 청와대가 떠안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은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사전 정지작업 부족한 정상회담 제안
정상회담 개최를 위해서는 상대에게 진정성을 전하는 사전 정지작업이 필수적이다. 대화상대가 얼마나 믿을 수 있는지 확신을 심어줘야 한다.
1차 정상회담은 2000년 3월 김 전 대통령의 베를린 선언이 중요한 시그널이 됐다. 김 전 대통령은 북한이 두려워하는 흡수통일 문제에 대한 해법을 제시하고 대북 인도적 지원 의사를 분명히 해 북한의 의구심을 떨쳐내는 데 성공했다. 베를린 선언만 해도 북한을 배려해 연설문 배포 하루 전에 판문점을 통해 북측에 내용을 전달하며, 선전용이 아닌 진지한 제의라는 점까지 설명했다.
2차 정상회담의 경우 북핵문제로 우여곡절을 겪었다. 2003년 3월 강석주 북한 외무성 부상의 핵보유 발언으로 북·미관계가 냉각됐고,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했다. 때문에 정권초기 모색되던 정상회담은 실현되지 못했다.
2005년 당시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김정일을 면담해 200만㎾ 전력과 식량 50만t 지원의사를 밝히고 곧이어 6자회담 참가국의 9·19 공동성명까지 나오면서 분위기가 반전됐다. 하지만 방코델타아시아(BDA)은행의 북한 자산 동결, 북한의 대포동 2호 미사일 발사, 핵실험 등으로 정상회담에 다시 먹구름이 끼었다. 그럼에도 남북 장관급 회담과 경제협력추진위원회 회담을 꾸준히 열어온 점, 그리고 미국이 2007년 북·미관계 정상화 등의 내용을 담은 2·13합의를 통해 대북정책을 전환하면서 정상회담 조건이 무르익어갔다. 정부는 정상회담을 준비하면서 남북 자유무역협정(FTA) 방안까지 검토했다. 나름대로 정상회담 분위기를 조성해 나간 것이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에선 사전정지 작업이 부족했다. 천안함 폭침사건 이후 5·24조치로 정부와 민간차원의 대북지원이 단절됐다. 대북심리전이 재개됐고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3부자를 사격훈련 표적지로 사용해 북한이 반발했다. 이 대통령이 지난달 9일 베를린에서 핵포기를 전제로 “내년 3월 핵안보정상회의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초대하겠다”고 말했으나 북한을 움직이기에는 역부족인 상황이었던 것이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이명박 정부가 인도적 지원을 재개하는 등 진정성을 보이며 정상회담 추진의사를 북한에 전달했어야 했다”고 말했다.
북한이 남북 비밀접촉을 폭로하면서 이명박 정부의 대외 신뢰도는 훼손됐지만, 해결책이 전혀 없지는 않다. 그 하나가 대북 특사 파견이다. 김정일과 안면이 있는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나 이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주중 대사를 지낸 류우익 전 청와대 비서실장을 특사로 보내 남북관계 개선 의지를 분명히 밝혀야 한다는 얘기다. 이봉조 전 통일부 차관은 “이 대통령이 정상회담에 대한 진정성을 특사 파견 등을 통해 알릴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제훈 기자 parti98@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