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칠곡은 지금… ‘3不 민심’ 르포] 왜관 미군기지 고엽제 대구·경북 표심까지 죽이나
입력 2011-06-23 17:46
“관심 없씹니더.”
미군이 캠프 캐럴 기지에 고엽제를 묻었다는 의혹이 제기된 지 34일째였던 경북 칠곡군 왜관읍. 지난 21일 왜관역에서 탄 택시의 기사는 고엽제 파문에 대해 잘라 말했다.
“왜관서 나고 자랐는데 이때까정 문제없으면 없지. 괜히 떠들어가 민심만 흉흉해요.”
-지하수에서 다이옥신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정부 발표, 믿으시죠?
“믿기는 무슨. 발견 되면 보상이 엄청날 낀데 정확히 조사했겠어요? SOFA(한미주둔군지위협정) 협정 자체를 잘못한 기지.”
택시가 칠곡군청에 도착했다. 기사는 이런 말을 덧붙였다. “불안하지. 뭐 어쩌겠어요?”
같은 날 왜관읍 석전1리 노인정. 술집과 식당 등 캠프 캐럴 후문에 형성된 상가에서 걸어서 5분 거리다.
“여 사는 사람 아무 관심 없어요.”
10원짜리 화투를 치던 할머니는 퉁명스레 대꾸하곤 손에 쥔 화투장으로 눈길을 돌려버렸다.
-정부 발표를 믿으시죠?
“안 믿지. 다들 제대로 (조사) 안 했다 카대.”
-외부 사람들이 왜관역에서 진상조사 촉구 집회를 자주 열었잖아요.
“우리는 늙고, 잘 모르니께 젊은 사람들 대신 와서 떠들어 주니까 고맙지. 와 싫노? 솔직히 더 떠들어 줬으면 좋겠다.”
오래 된 전축에선 ‘뽕짝’ 노래가 크게 흘러나왔다. 할머니 여섯 명은 모여 앉아 패를 돌리고, 나머지 할머니 한 명은 구경에 열중했다.
“고엽제는 저거 나라에 파묻어야지, 와 남의 나라 와서 파묻고 지랄이고!”
할머니는 갑자기 언성을 높였다. 그러면서도 이렇게 말을 이어갔다. “그래도 북한 땀시 미군이 있어야 한다 카이.” 그러자 다른 할머니가 맞받아쳤다. “아이다! 그거 다 우리가 (미군 부대에) 돈 주는 거라 카대.”
고엽제 파문이 한 차례 휩쓸고 간 주민들은 일단 “관심 없씹니더”로 말을 시작했다. 이건 진심일까, 진심이 아닐까.
진보와 손잡은 경북 칠곡
한 농민은 칠곡군의 조용한 분위기를 이렇게 설명했다.
“보수 성향의 동네이고 고엽제, 이게 문제 된다면 우리 지역은 살 곳이 안 된다 생각해서 조용한 척 할 수 있는 거고요. 보릿고개 시절에 미군 덕을 본 사람도 꽤 있고, 농산물 가격이 떨어질까 염려하는 사람도 있는 거지요.”(한국농업경영인 칠곡군연합회 이만호 회장)
침묵 속에서도 플래카드는 거친 시위라도 벌이듯 곳곳에서 나부꼈다. 왜관역과 칠곡군청 인근에 걸린 플래카드들은 작성 주체와 내용에 따라 이렇게 분류된다. 작성 주체는 칠곡군 주민인 ‘내부세력’과 그렇지 않은 ‘외부세력’으로 나뉘었다. 외부세력은 철저한 진상 조사를 촉구하는 내용을, 내부세력은 다음 세 가지 내용을 써 붙였다.
①외부 세력이 개입해 불안을 조장하지 마라 ②언론사는 과장 보도를 자제하라 ③정부는 진상 조사를 철저히 하라. 외부세력으로 일컬어지는 단체는 민주노총, 민주노동당, 대구·경북 시민단체 등이다. 내부세력은 칠곡군의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대한민국 6·25참전유공자회, 재향군인회, 자유총연맹 등이다.
정부 인사도 칠곡군을 방문해 ‘외부세력 대항론’에 일조했다. 지난달 25일 칠곡군청을 방문해 농민들과 만난 이재오 특임장관은 이렇게 말했다. “칠곡군과 관계없는 외부세력이 개입해 사실 확인을 하기도 전에 문제를 일으키지 않도록 칠곡군민이 일차적으로 막아줘야 한다.” 이 장관이 이 자리에서 노란 칠곡 참외를 껍질도 벗기지 않고 맛있게 먹는 사진은 여러 매체에 보도됐다.
그런데 요즘, 칠곡군이 달라졌다. 보수 성향의 칠곡 주민 단체(캠프 캐럴 고엽제매립 진상규명을 위한 민간대책협의회·33개 단체로 구성)와 진보 성향의 외부세력(왜관미군기지 고엽제매립범죄 진상규명 대구경북대책위원회·52개 단체로 구성)이 손을 잡았다. 두 단체는 최근 간담회를 한 데 이어 24일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에서 열리는 두 번째 주민문화제에 함께 참석키로 했다. 고엽제에 대한 강연과 문화 행사가 열리는 주민문화제는 진보 성향 단체가 지난 10일 처음 시작했다.
화합의 불씨는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이 댕겼다. 고진석 신부는 “한나라당이냐, 진보신당이냐 구분 없이 지금은 같은 목표를 갖고 있다”고 했다. “처음에는 안 좋아했는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진정성이 느껴졌다.”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민주평통) 칠곡군협의회와 캠프 캐럴 고엽제매립 진상규명을 위한 민간대책협의회 회장을 맡은 장영백(63)씨 얘기다. 외부세력 개입을 저지하자는 내용의 플래카드도 고엽제 파문 직후보다 훨씬 줄어든 것이라고 한다.
생명과 안전 문제가 이념을 넘어섰다.
불신의 그늘
이들의 협력에는 한미공동조사단에 대한 불신이 깔려 있다. 공동조사단이 하천과 지하수부터 조사해 발표한 것은 중앙 언론의 관심을 돌리기 위한 ‘시간끌기’라는 의심이다. 다이옥신은 토양이나 침전물에 흡착되고 물에는 잘 녹지 않는다.
민간이 추천한 전문가가 없다는 것도 불신의 이유다. 경상북도 녹색환경과 관계자는 “진보는 좀 그렇고, 보수 성향이라고 판단한 이재혁 대구경북 녹색연합 운영위원장을 추천했는데 (공동조사단 명단에) 빠졌다. 이 위원장은 미군기지 감시 활동을 활발히 해 온 인물”이라고 했다.
한미공동조사단의 한국 측 조사단원 구성은 이렇다. 중앙부처 공무원 5명, 정부와 지자체가 위촉한 교수와 국립연구원 5명, 지역민 5명. 위촉된 지역민 중 전문적 식견을 갖춘 이는 없다. 칠곡군청 환경관리과장, 칠곡군 의장, 경상북도 부의장, 사회복지학 교수, 민주평통 칠곡군협의회장이 그들이다.
장영백 민주평통 칠곡군협의회장은 “참관도 제대로 안 되고, 구경하는 게 전부다. 견제하고 감시할 수 있는 인물이 필요하다”고 토로했다.
이종춘 경북과학대 사회복지학과 교수에게 상황을 물었다.
-어떤 점에서 참여가 어렵나?
“주한미군과 협의하는 과정이 더디다. 정작 문제가 터진 칠곡군에서는 정보 얻는 게 어렵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오전 9시부터 시료 채취하는데 나한테는 8시30분에 연락이 오는 식이다. 칠곡군수도 로드맵 짜고, 계획을 미리 알려달라고 하는데 공유가 안 된다.”
-조사 과정을 어떻게 보나?
“의혹투성이다. 토양이 다이옥신에 취약해서 하천 침전물이나 토양부터 조사하자는 데도 물부터 조사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그 문제를 지적하면 토양도 조사 중이라더라. 그러면서 지금 장마가 오니까 조사가 언제까지 연기될지 모르겠다고 팀장이 그러더라. 나야말로 공동조사단을 믿고 싶다.”
-전문가 영입을 제안하지 그랬나?
“했다. 정부에서 덜 좋아하더라도 민간인이 추천하고 신뢰할 수 있는 전문가나 교수를 포함시키자, 합동조사단 결과 발표를 놓고 민간 전문가와 함께 토론회를 열자고도 여러 차례 제안했다. 대답이 없다. 소통 부재다.”
언론에 제공되는 모든 정보는 SOFA 환경분과위원회 한·미 양측 위원장의 승인을 받도록 돼 있는 ‘SOFA 환경정보 공유 및 접근절차 부속서 A’도 지역민의 불신을 증가시킨다. 중앙정부와 협의 없이 경상북도가 의뢰한 포스텍 장윤석 교수팀의 수질 분석 결과도 이 규정 때문에 공식 발표되지 못했다. 장 교수는 지난달 “캠프 캐럴 인근 지하수 3곳의 시료를 채취해 검사한 결과 1곳에서 극미량의 다이옥신 흔적이 보였다”고 언론을 통해 독자적으로 밝혔다. 그러나 공동조사단은 지하수가 아닌 하천에서만 검출 한계 값을 밑도는 극미량의 다이옥신이 검출됐다고 지난 16일 밝혔다.
무서운 침묵
고엽제 파문으로 인한 불안과 불만은 칠곡군을 넘어 보수의 깃발인 대구를 습격했다.
아들에게 줄 반찬을 보자기에 싸서 양손에 든 김인순(64·여)씨는 20일 대구역에서 수원행 무궁화 열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씨는 “고엽제 파문 이후 생수를 사 먹었고, 국 끓일 때도 수돗물 쓰는 게 꺼려진다. 정부가 지방 사람을 기만하는 느낌이다. 한나라당 무조건 믿는 거, 대구에서도 이젠 없다”고 했다.
대구에선 불안감 탓에 생수 판매량이 증가했다. 대구에 8개 매장을 두고 있는 이마트는 고엽제 보도 직후인 5월 19일∼6월 18일 생수 판매량이 전월 대비 26.4% 늘었다. 전년 동기 대비로도 4.6% 증가했다. 대구의 홈플러스 매장 8곳도 보도 직후 한 달 생수 매출이 전달보다 23.3% 증가했다.
“한나라당은 한참 떠들썩하더만 치아 버리고, 야당이 (고엽제 문제를) 더 떠들대. 우리가요, 이 사람 어떤지도 모르고 한나라당이다 하면 다 찍어줬어요. 그런 식으로 나오면 (표) 없어요. 젊은 사람은 한나라당, 쳐다도 안 봐. 차라리 무소속 찍지.” 대구역에서 만난 박봉규(51·대구 고성동)씨 말이다.
대구경북 녹색연합 이재혁 운영위원장은 “박근혜 의원을 제외한 대다수 대구 의원들이 국회에서 제대로 목소리를 못 낸다는 게 전반적 인식이다. 이제 대구에서도 한나라당, 힘들다. 초선도 아니고 몇 차례 당선된 의원이 녹색연합 기웃거리며 이미지 바꾸려는 거 보니 알겠더라”고 했다.
고엽제 파문이 일어난 경북 칠곡군은 무서울 만큼 조용하고 무관심했다. 그러나 불안의 그늘은 대구까지 엄습하고 있었다. 지난 20∼21일 칠곡군과 대구에서 만난 주민 중 정부 발표를 믿는다는 사람은 없었다. 군청 인근에 과장 보도를 자제하라는 플래카드를 붙인 금남리 오이마을 주민들도 “과장된 보도가 싫을 뿐,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했다.
가장된 침묵의 경북 칠곡군. 침묵 속에 가려진 불신과 불안, 불만이 대구·경북 일대에 어떤 파동을 그려갈지는 지켜볼 문제다.
대구·칠곡=박유리 기자 nopimul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