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김혜림] 그들이 원수로 불린 이유

입력 2011-06-20 17:32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이 아니었다. 도심이었다. 서울 영등포에서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 살았다. 궁핍한 1960년대였지만 그곳은 풍족했다. 복주머니 모양의 초콜릿을 언제든 먹을 수 있었다. 누이면 눈을 감는 노랑머리 인형도 있었다.

구경거리도 넘쳐났다. 주말 저녁마다 어른들 몰래 집을 나섰다. 백설기처럼 하얀 피부에 파란 눈을 가진 아저씨들을 보기 위해서. 그들 옆에는 언제나 노랑머리 언니들이 있었다. 그들을 어른들은 ‘양공주’라고 불렀다. 저렇게 예쁘니 공주가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초등학교 들어갈 때쯤 양공주와 동화 속 공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리고 그 동네를 떠나고 나서야 그곳의 풍족함이 부근에 주둔한 미군기지 덕분임을 알았다. 새로 이사 간 곳의 아이들은 초콜릿의 달달한 맛을 알지 못했다. ‘목욕탕에서 양공주가 앉았던 곳에는 절대 앉지 말라’는 잔소리를 들어 본 아이들도 없었다.

20, 21일 폭염주의보가 내렸다는 뉴스에 달력을 챙겨봤다. 수박 1통 없이 복날을 보냈나 싶어서. 6월 달력에는 복(伏)날도 소서(小署)도 없었다. 올해 6·25는 토요일이란 것만 확인했다. 그리고 입안 가득 침이 고였다. 드러내놓고 말하기 민망하지만 전쟁을 겪지 않은 기자에게 6·25는 동족상잔(同族相殘), 이념전쟁(理念戰爭) 등 추상적 단어보다는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초콜릿의 달콤 쌉싸래한 맛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6·25 노래가 이어진다.

정말 열심히 불렀다. 6·25 기념 조회 때뿐만이 아니다. 38선을 넘어오는 탱크를 향해 수류탄을 몸에 달고 돌진한 국군 아저씨들,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치다 입이 찢겨 죽은 이승복 소년을 배웠을 때…. 그런 날은 고무줄을 하면서, 공기를 하면서 더욱 목청껏 불렀다.

“조국을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맨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내어/발을 굴러 땅을 치며 의분에 떤 날을/이제야 갚으리 그날의 원수를/쫓기는 적의 무리 쫓고 또 쫓아/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이제야 빛내리 이 나라 이 겨레”

세상에! 이 노랫말은 초등학교 계집아이들이 폴짝폴짝 고무줄을 하면서, 공깃돌을 푸른 하늘을 향해 던져 올리면서 부르기에는 너무나 끔찍하다. 아니 사내아이들이 제기나 공을 차면서 부르기에도 적절하지 않다.

내 아이들도 팔을 흔들고 발을 구르며 이 노래를 부르며 자랐을까? 대학생인 두 아이는 요즘 학교에선 조회 같은 건 하지도 않고, 더구나 이런 노래는 부를 일이 없다고 답했다. 다행이다 싶었지만 이내 아차 했다. 학교에서 가르치지는 않지만 이 노래가 일상에서 사라진 건 절대 아니다. 국가보훈처 주관 6·25 전쟁 기념식에선 해마다 이 노래가 울려 퍼진다. 이번 주말 오전 10시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펼쳐질 기념식 순서에도 이 노래의 제창이 들어 있다. 물론 TV에서 중계할 것이다.

지난해 말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가 서울 시내 초·중·고생 124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2명 중 1명(49.9%)은 6·25 발발 연도조차 몰랐다. 6·25를 잘 모르는 아이들이 이 노래를 들으면 어떨까. 6·25란 전쟁이 있었다. 그 전쟁을 일으킨 자들은 조국을 짓밟은 원수들이다. 6·25는 북한이 일으켰다. 그럼 북한 사람은 마지막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야 되는 원수…. 이런 이미지로 전개되기 십상이다.

동족을 원수로 묘사한 6·25 노래를 교정에서 추방하기보다는 이 노래를 통해 6·25를 제대로 자세히 알리는 게 옳다. 6·25 전쟁은 북한이 일으켰다. 수백만 명이 죽을 만큼 참혹했기에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는 북한을 원수로 묘사했다. 하지만 북한은 우리와 함께 살아가야 하는 동포다.

이번 주말 우리 아이들과 함께 6·25 기념식을 보면서 왜 저런 노래가 나왔는지 알려줘야겠다.

김혜림 문화과학부 선임기자 ms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