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호의 씨네마 부산-PIFF 15년의 기록 (21·끝)] 은퇴 나이에 맞은 황금기 난 행복한 로비스트였다

입력 2011-06-16 18:05


지난 15년, 저는 제 인생의 ‘황금기’를 보냈습니다. 이순(耳順)에 황금기를 열고 고희(古稀)에 절정을 맞았으니 이보다 더 행복할 수 없습니다. 15년 동안 부산국제영화제는 부산의 영상산업을 주도했고 한국영화의 도약을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부산국제영화제의 최대 수혜자는 바로 저였습니다. 암담하던 ‘영어’의 벽을 허물었고, 좁았던 ‘시야’를 세계로 넓힐 수 있었습니다. 동경과 선망의 대상이던 미지의 세계를 한도 원도 없이 돌아다녔습니다. 해외의 수많은 사람들과 친교를 맺었고, 한국영화의 ‘로비스트’ 역할을 했습니다. 1년에 100∼200편 영화를 보았고, 세계적인 거장 감독들과 친해졌습니다. 이보다 더한 복이 있겠습니까.

현장에서 익힌 영어

중·고교 시절 제 영어는 과락을 넘나들었습니다. 서울대 법과대학 입시 때 영어는 포기하고 국어 수학 등 다른 과목에 승부수를 두었습니다. 합격은 행운이었죠. 1969년 청량리 대왕코너에 영어학원이 문을 열었습니다. 미국 평화봉사단 대학생들이 ‘English 900’을 교재로 강의하는 회화 학원이었습니다. 문화공보부 서기관이던 저는 ‘새벽반’에 등록하고 중·고생 10여명과 함께 ‘기본문장’을 달달 외우면서 1년을 다녔습니다. 공보국장이던 76년 3주 동안 영국 공보성(COI) 초청으로 워크숍에 참가해서 무척 고생했습니다. 귀국하면 영어공부에 전념하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때뿐이었습니다.

88년 문화공보부를 떠나 영화진흥공사로 옮겼습니다. 공사를 방문하는 외국 영화인이 적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통역을 배석시켰지만 자존심이 허용치 않았습니다. 공사에서 4년, 공연윤리위원회에서 2년을 보내며 저는 새벽마다 영어학원에 다녔습니다. 52세에 다시 시작한 영어공부는 공사 4년을 지내면서 그런대로 의사소통은 가능하게 됐습니다. 96년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가 성공적으로 끝나고 저는 많은 해외영화제에 초청받았습니다. 1년에 절반 이상을 해외에서 보내며 현장에서 영어를 익혔습니다. 점차 자신이 생겼고 영어구사에 불편이 없게 됐습니다.

부산영화제는 제 좁은 시야와 견문도 넓혀줬습니다. 저를 ‘국제인’ ‘세계인’으로 만들어줬습니다. 고교나 대학 시절 저는 영화 볼 기회가 없었습니다. 영화진흥공사에 부임한 88년 이후의 국내외 영화는 많이 봤지만 그 이전 영화에 대해서는 ‘백지’에 가깝습니다. 법학을 전공했기에 영화이론에도 약합니다. 제1회 부산영화제가 성공하면서 국제영화제 심사위원으로 초청받기 시작했고, 많은 영화를 의무적으로 보면서 나름대로 분석, 평가하고 토론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습니다.

97년 로테르담영화제를 비롯해 시네마닐라(2000), 도쿄필름엑스(2006), 삿포로(2007), 베오그라드(2008), 바르셀로나(2008), 오키나와(2009·2010), 후쿠오카(2009), 제카로(2010), 타이베이(2010), 브라티슬라바(2010) 등 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장을 맡았습니다. 심사회의 주재는 물론 무대인사, 기자회견, 결과 발표 등 많은 경험을 축적한 것은 귀중한 수확이었습니다.

또 제58차 세계영상자료원연맹 총회(2009)에서 기조연설을 한 것을 비롯해 많은 국제회의에 참석해 발표했습니다. 짧은 영어 실력에 배석도 없이 혼자 다닌 것은 영어훈련을 겸해 국제적인 시야를 넓히기 위해서였습니다. 특히 2007년 11월 25일 후쿠오카에서 NHK가 녹화 중계한 ‘세계문화포럼’에 참석해 아오키 일본 문화청 장관, 중국의 원로감독 세이진(謝晉)과 2시간에 걸쳐 3자 토론을 가졌던 일은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홀대 받았던 인도영화제의 교훈

15년간 저는 원 없이 ‘세계여행’을 했습니다. 나이 60에 역마살이 껴도 겹으로 낀 것 같았습니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를 떠나면서 세계영화제 기행을 묶어 ‘영화, 영화인 그리고 영화제’(문학동네)란 책을 펴냈습니다. 70여개 영화제를 다녔지만 38개 영화제만 수록했습니다.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영화제를 방문한 사람에 속할 것 같습니다.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가 끝난 후 처음 방문한 영화제는 하와이영화제였습니다. 부산에 왔던 오랜 친구 재닛 펄슨 집행위원장이 초청한 것이죠. 저는 ‘귀빈’ 자격으로 96년 11월 8일부터 15일까지 하와이에서 보냈습니다. 박광수 감독이 심사위원으로 참가했고 이민용 감독의 ‘개 같은 날의 오후’가 경쟁부문에서 상영됐습니다. 개막식에서 재닛 펄슨은 부산국제영화제를 극찬하며 저를 무대에 올려 소개했습니다. 다음해에는 심사위원으로 다시 하와이영화제를 방문했고, 펄슨의 뒤를 이어 집행위원장이 된 크리스천 게인즈와도 곧 친구가 됐습니다.

두 번째는 인도영화제였습니다. 96년 하와이영화제에서 귀국하자마자 인도 시네마야 발행인 아루나 바수데프 여사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이듬해 1월 10일 개막하는 제28회 인도국제영화제에 임권택 감독을 초청하고 싶다면서 저도 함께 와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장소는 인도 남부의 티루바난타푸람이었습니다.

썩 내키지 않아 하는 임 감독을 설득해서 1월 10일 김포공항을 출발, 밤 9시15분 뭄바이공항에 도착했습니다. 마중 나온 관리는 임 감독만 숙소인 영빈관으로 모시겠다고 버텼습니다. 저는 별도비용을 부담할 테니 방 하나를 더 주든가 아니면 함께 투숙하겠다고 했지만 막무가내였습니다. 할 수 없이 둘은 공항 근처 호텔에 투숙한 후 다음날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영화제 사무국에서 임 감독 호텔은 확인됐는데, ‘호텔 제공에 일당까지 주겠다’는 초청장을 지참하지 않았던 제 숙소는 확인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저는 방 하나를 제 비용으로 부담할 테니 제공해 주거나 추가 비용을 내고 임 감독 방에 함께 투숙하겠다고 했지만 호텔에서는 좋다고 하는데도 영화제 데스크에서는 안 된다고 버텼습니다. 결국 호텔 측과 합의해 숙박비 전액을 선불하고 방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티루바난타푸람에 도착한 건 토요일이었습니다. 월요일에야 서울로 연락해 초청장 사본을 팩스로 받아서 사무국에 제출하고 따졌습니다. 정식 사과를 받고 돈도 환불 받았지만 기분은 완전히 잡쳤습니다. ‘부산’이 아직 안 알려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무튼 이때의 경험은 부산영화제 운영에 귀중한 교훈이 됐습니다.

1997년 로테르담영화제에는 심사위원장으로 초청됐습니다. 이를 계기로 세계 영화제를 누비고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올해까지 칸영화제는 16번, 베를린영화제와 로테르담영화제는 14번 찾았고, 프랑스 도빌 아시아영화제와 이탈리아 우디네 극동영화제도 10번 이상 방문했습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북한을 방문해 북한 영화계 실상을 알게 된 것 또한 수확이었습니다. 부산영화제를 준비하면서 ‘아리랑’ ‘만추’ 등 없어진 필름을 구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 일환으로 1999년부터 북한 당국과 교섭해 2000년 5월 15일, 북한영화 7편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하기로 합의했지만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영화제가 끝난 후 11월 11일부터 18일까지 한국영화대표단 10명이 북한에 가서 조선예술영화촬영소, 조선컴퓨터센터, 만수대창작사 등 영화 관련 기관을 방문하고 북한 영화인을 만났습니다. 임권택 감독, 강우석 감독, 이은 감독, 유인택 대표, 문성근, 이용관 당시 영화진흥위원회 부위원장, 최평호 CJ엔터테인먼트 상무 등 10명은 북한 영화촬영 현장을 직접 볼 수 있었습니다. 조선영화수출입사 부사장은 저작권 문제, 프린트 복사 기간 등의 이유로 부산영화제에 필름을 보내지 못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부산아시안게임 개최 직전, 북한당국과 전격 합의해 2003년 제8회 영화제에서 북한영화 7편이 상영됐습니다.

지난 15년 동안 부산국제영화제 덕에 민망할 정도로 많은, 제가 받을 수 있는 모든 ‘상(賞)’을 수상했습니다. 은관문화훈장(2005), 제4회 대한민국영화대상공로상(2005), 황금촬영상 특별상(2007), 자랑스러운 영화인상(2010), 제1회 올해의 부산인상(1997), 제1회 부산문화대상(2000), 일맥문화대상(2010) 등입니다. 외국에선 더 많은 상을 탔습니다. 프랑스에서 예술문학훈장 기사장(2000), 프랑스문화예술훈장 오피시에(2007), 한불문화상(2009), 파리시훈장(2006), 도빌시 훈장(2006), 베줄시 훈장(2011)을 받았고 유네스코 펠리니상(2007), 미국 언론재단이 주는 닐슨 임팩트 어워드(2008), 시네 마닐라 평생공로상(2005), 아르메니아 문화부 훈장(2006), 아시아그라프 공로상(2008), 아시아영화특별공헌상(2011·홍콩) 등을 수상했습니다.

이 모든 영광은 부산국제영화제와 함께해 온 스태프와 자원봉사자들의 것이어야 합니다. 지난 15년을 회고하면서 저에게 인생의 황금기를 가져다 준 모든 분들께 이 모든 영광을 드립니다. 성원해 주신 국민일보 독자 여러분께도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