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값등록금 촉구’ 집회 참석한 한빛교회 청년들 “예수님이라면 눈 감고 귀 닫았을까?”

입력 2011-06-15 17:40


지난 5일 반값등록금 촉구 촛불집회가 열린 서울 청계광장. 배성진(29·서울 미아동 한빛교회) 전도사도 그 틈에 있었다. 울분에 찬 소리 구호. 배 전도사도 힘들었던 학창생활의 기억을 불러내기에 충분했다.

학창시절. ‘대학생활’이 아닌 ‘대출생활’이었다. 4년 동안 학자금 대출 다섯 차례. 매년 은행 대출로 학비를 충당했다.

부모님께 손 벌리지 않으려 애썼다. 1학년, 그 어린 나이부터 그는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낮엔 오토바이를 몰며 음식을 나르고 새벽엔 택배회사에서 물건을 분류했다. 방학엔 중국집과 교계 언론사에서 번갈아 일했다. 형편이 나아지지 않자 건설 현장까지 기웃거렸다. 매일 일거리를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한 달에 버는 돈은 평균적으로 30만∼50만원에 불과했다. 등록금? 엄두도 나지 않았다. 아무리 끼니를 줄이고 쓸 것 안 쓰고 아껴도 방값, 생활비도 빠듯할 정도였으니까. 낮은 학점은 외려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발에 땀이 나도록 돌아다니며 일을 하는데…. 학점이 좋을 리 만무했다. 그나마 유쾌한 성격 때문에 동아리연합회장과 총학생회장을 지냈다. 장학금 조금 받을 수 있었다.역시 대학생인 두살 터울의 형도 주유소 등에서 아르바이트를 쉬지 않았다.

‘대출-아르바이트-낮은 학점’의 악순환은 지금까지 배 전도사를 옥죈다. 아직도 그는 학자금 대출 원금과 이자를 꼬박꼬박 치른다. 그가 갚아야 할 대출금은 1500만원에 이른다. 돈 갚으라는 독촉 전화.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는 비현실인 줄 알았다. ‘정말 무식하게 독촉하는 구나.’ 처음 느꼈다. 아버지 교통사고 상해 보험금 1000만원으로 급한 불을 껐지만 불씨까지 진압한 것은 아니다. 남은 대출금 340만원은 3년 분할로 매달 10만원씩 갚아 나간다.

한신대 신학대학원을 올해 졸업한 그는 요즘 주말엔 전도사로, 평일 낮엔 지역아동센터 교사로 일한다. 꾸역꾸역 석사학위를 받은 게 스스로 대견할 정도다. 신앙생활 열심히 하고 기도하며 긍정적으로 생활하는 것이 스스로도 대견했다. 기도하고 말씀 읽고 학생들과 교제하면서 마음은 편해졌다.

한빛교회(유원규 목사)에 출석하는 대학생들에게도 등록금 문제는 발등의 불이다. 요즘엔 예배를 마친 뒤 함께 손을 잡고 기도할 때마다 등록금 관련 기도가 빠지는 적이 없다. 학생들의 기도에 배 전도사의 눈시울은 매주 한번 붉어진다. ‘어머니 아버지 힘들지 않게 해 달라’ ‘역경을 딛고 하나님 일 할 수 있는 일꾼으로 이끌어 달라’는 기도. 힘든데도 아이들은 어쩜 그리 마음씨가 예쁜지…. 그러니 더 아프다.

그가 서울 미아동에서 반값등록금 실현 촉구 집회가 열리는 청계광장까지 매일 나오는 이유. 남일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과 같은 아픔을 사랑하는 교회 청년, 동생, 후배는 겪지 않았으면 하는 절박함, 그게 발을 끈다.

배 전도사는 이날 연행됐다. 이틀 동안 조사를 받고 풀려난 그는 10일 같은 장소를 다시 찾았다.

교회 청년들은 집회 때마다 10여명이 동참한다. 이 교회 이해동(77) 원로목사, 홍승헌(36) 청년부 담당 목사도 함께였다. 1955년 설립된 이 교회. 76년 민주구국선언서 사건(3·1 명동 사건), 89년 문익환 목사 방북 등의 중심이 된 교회로 유명하다. 민주화투쟁에 앞장서는 교회여서일까. 교회 일꾼들은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장종수(29)·종화(25) 형제도 함께했다. 부모의 휘는 허리, 그 원인이 자신들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안타까운 마음. 촛불로 떨어진 종수씨의 눈물 한 방울이 그들의 쓰라린 마음을 대신했다. 눈물방울에 촛불은 흔들렸다. 그 촛불처럼 연약하게 흔들리는 자신들을 잡아달라고 기도를 반복했다.

이복희(45·여) 집사는 집회 내내 자신의 양손을 꼭 쥔 채 기도했다. 등록금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간절한 기도였다. 힘들어하는 교회 청년들에게 힘을 주기 바랐다. 그 역시 곧 등록금을 대야 할 어머니. 안타까움은 더했다. 청년 하나하나 어루만지며 위로하는 그의 손길에서 안타까움과 사랑이 동시에 묻어났다.

이들의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본 이해동 원로목사. 민주화 불꽃의 중심에서 평생 목회를 해왔던 그의 눈동자는 이날도 빛났다. 자기 자식과도 같은 목회자, 청년들이 우르르 몰려간다기에 아내와 함께 따라 나온 자리. 한탄스럽기 그지없었다.

모여 손잡고 기도하는 홍 목사, 배 전도사, 그리고 청년들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교회가 등록금 문제와 같은 사회적 이슈에 적극 동참해야 한다는 것, 예수의 삶과 동떨어져 이런 문제에 눈을 감고 귀를 닫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리곤…. 결정적인 순간 가장 중요한 지시를 내리는 장군처럼 근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행동하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현실이, 지금의 일상이 너무나 힘들지만 자신의 믿음을 죽은 믿음이 아닌 산 믿음으로 만들려는 이들의 목소리가 우렁찼다. 청년들의 모습을 안쓰럽게 지켜보던 배 전도사.

‘예수라면 어떻게 했을까.’ 오늘 크리스천 청년들, 묻고 또 묻는다.

글 유영대 기자·사진 신웅수 대학생 기자 ydy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