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선 약사의 미아리 서신] 스물다섯 현아씨

입력 2011-06-15 17:58


여름이 성큼 다가와 콧잔등에 땀을 맺히게 하는 유월입니다.

진분홍 꽃을 환하게 피우고 있는 넝쿨 장미가 소담스럽고 흐드러진 밤꽃의 향기가 초여름의 밤을 가득 채웁니다. 6월의 향기 때문에 밤나들이를 즐겨 하고 있답니다.

저의 여름 맞이는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아삭한 야채 피클을 사먹으려니 가격이 만만치 않아 인터넷을 검색해 만드는 법을 익혀서 직접 만들어 먹었답니다. 상큼한 맛이 제법 들어서 더위에 지친 입안을 달래줍니다.

“사는 게 재미없어요”

입에 맞는 음식 만드는 법을 익혀서 하나씩 만들어 먹는 일도 생각보다 꽤 재미있습니다. 자주 만들어 먹는 음식 중 하나가 청국장찌개입니다. 강원도 여행길에서 맛깔스런 음식점을 만나게 되어 그 주인 아주머님께 졸라서 사 가지고온 청국장이 냉장고에 떡하니 버티고 있는지도 좀 되어 찌개를 만들었답니다. 약국에서 모처럼 맘에 드는 점심을 먹을라치면 아무리 환기를 하여도 청국장 고유의 냄새는 오랫동안 남게 됩니다. 며칠 전 제가 점심을 한 뒤 얼마 되지 않아 약국에 들어온 현아씨는 얼굴을 찌푸리며 코를 막았습니다.

이게 무슨 냄새냐면서 짜증을 내는 그녀는 쉽게 굳은 얼굴을 풀지 않았고 저는 계속 미안하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그녀가 원하는 감기약을 주었습니다. 약의 복용법을 더 설명하려고 하였으나 그녀는 약값이 얼마냐고 물어보면서 돈을 올려놓고 휑하니 나가버렸습니다. 당혹스러웠고 미안하였습니다.

며칠 뒤 그녀가 약국 문을 열고 조금은 경직된 얼굴로 들어왔습니다. 다시 와준 그녀가 너무 고마웠던 저는 반갑게 그녀를 맞이하였지요. 감기는 나았으나 심한 두통에 시달리고 있다고 좀 좋은 약을 추천해 달라고 하는 그녀는 그때처럼 그렇게 굳은 얼굴이었습니다.

어디가 많이 아프냐고 아픈 곳을 전부 이야기해 보라고 하니 굳은 얼굴이 풀리면서 그녀는 심한 변비와 두통 그리고 불면증까지 있다면서 사는 게 재미없다고, 아니 싫다고 하였습니다. 그녀의 나이는 스물다섯입니다.

그녀는 영등포 집장촌에서 이리로 오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거기서는 여러 가지 이유로 일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현아씨는 얼굴만이 아니라 온몸과 마음이 모두 굳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뭉치지 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온몸의 세포가 다 굳어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녀의 팔을 만지고, 등을 만지면서 제 혈관 속으로 전해지는 그녀의 눈물을 어찌할 수 없음이 많이 미안했습니다.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현아씨가 편하게 살면 정말 좋겠어요. 너무 많이 미워하지 말고 원망하지 말고 그렇게 살아요. 미움의 마음이 당신의 몸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어서 모든 흐름을 막고 있어요. 혈액도 흐르지 못하고, 기운도 흐르지 못하고 모든 병이 생기고 있어요, 버리고 가볍게 살아요. 그래야 당신이 행복할 수 있어요.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하나님 아버지의 크신 사랑이 저와 그녀의 이야기 사이에 살포시 내려앉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손 잡아주는 그 누구도 없습니다

얼굴이 조금 풀어진 그녀는 아직도 무거워 보이는 어깨를 하고 다시 험한 세상으로 나갔습니다. 그녀가 힘들게 걷는 걸음걸음마다 하나님 아버지의 크신 축복이 같이하길 진심으로 바랐습니다. 이곳 미아리 집장촌은 가장 거칠고 험한 삶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어두컴컴한 골목 가운데 유리창에 쳐져 있는 검은 커튼들만이 집장촌의 밤과 낮을 지켜주고 있습니다. 그녀들이 안고 있는 슬픔이 너무 크고 깊습니다. 밝은 세상으로 발을 내딛기가 두려워 망설이는 그녀들에게 손을 잡아주는 그 누구도 없습니다. 세상을 원망한 채 온몸을 웅크리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저를 이곳으로 이끄신 깊은 이유를 아직도 알 수는 없었습니다. 그녀들을 만지고 안아주면서 살고 싶습니다. 그녀들이 밝은 세상으로 향하여 떨리는 발을 어렵게 내려놓을 때 그 발을 잡아주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