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난 ‘길손들의 쉼터’ 옛 정취 아련… 경북 예천 삼강주막

입력 2011-06-15 17:33


4대강 공사로 한동안 시끌벅적하던 경북 예천의 삼강주막이 오랜만에 평온을 되찾았다. 주막 앞을 흐르던 황토색 낙동강은 초록물감을 풀어놓은 듯 더욱 짙푸르고 중장비 소음에 몸서리치던 500년생 회화나무 고목은 매미소리를 자장가 삼아 산들산들 부는 강바람에 오수를 즐기고 있다.

삼강(三江)은 예천 회룡포를 휘감아 흐르는 내성천과 문경에서 발원한 금천이 삼강나루에서 안동 하회마을을 돌아 나오는 낙동강과 합류한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 여기에 안동 학가산, 문경 주흘산, 대구 팔공산의 끝자락이 세 강줄기와 만나면서 기(氣)가 충만한 삼산삼수(三山三水)의 고장을 형성하고 있다. 전략적 요충지이자 천하명당인 삼강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신라, 고구려, 백제가 주막 상류의 원산성에서 200년 동안 전투를 벌인 것이 이 때문이다.

예로부터 삼강은 한양 가는 길목으로 문경새재를 넘는 선비나 장사꾼은 반드시 이곳에서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야 했다. 여기에 소금배 등이 낙동강을 오르내리면서 삼강나루에 자리 잡은 삼강주막은 늘 장사꾼과 길손들로 문전성시를 이뤄 장날이면 나룻배가 30여 차례나 오갈 만큼 분주했다.

강의 길목에는 나루가 있고 나루에는 어김없이 주막이 있었다. 수운이 발달하면서 조선팔도의 주막은 한때 2000여개로 늘었지만 강을 건너는 다리가 생기고 고개 아래로 터널이 뚫리면서 하나 둘 없어지더니 급기야 삼강주막 하나만 남았다.

마지막 사공인 유영하씨가 삼강나루를 떠난 때는 1980년대 중반. 삼강나루 하류에 다리가 생기자 나룻배를 찾는 길손이 눈에 띄게 줄었기 때문이다. 2004년에 낙동강을 가로지르는 삼강교가 완공되자 더욱 쓸쓸해진 삼강주막은 이듬해 가을 21세기의 마지막 주모로 불리는 유옥연(당시 90세)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면서 아무도 찾지 않는 폐가로 전락했다.

삼강나루에는 본래 주막이 4채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갑술년(1934년) 대홍수 때 보부상 숙소와 사공 숙소를 비롯해 3채의 주막이 떠내려가고 100여년 전에 지어진 유옥연 할머니의 삼강주막만 남았다. 삼강주막도 절반 이상이 물에 잠기면서 기울었으나 2008년 복원공사로 바로섰다. 함께 복원된 보부상 숙소와 사공 숙소를 비롯해 여러 채의 초가집 주막은 옛 추억을 찾아 나선 길손들로 연일 북적거리며 현대판 주막으로 거듭났다.

초가로 단장한 삼강주막의 비좁고 어두운 부엌에는 유옥연 할머니가 생전에 기록해 놓은 외상장부 3개가 눈길을 끈다. 할머니의 손때가 덕지덕지 묻은 외상장부는 원시시대 상형문자처럼 부엌 흙벽에 새겨져있다. 유리판을 덮어 보호되고 있는 뱃사공 외상장부는 빗살무늬토기를 펼쳐놓은 듯하다. 외상을 줄 때마다 할머니는 날카로운 칼로 빗금을 하나씩 그었다. 뱃사공은 가을에 추수가 끝나면 마을 주민들로부터 뱃삯을 쌀로 받아 외상을 갚았다.

재미있는 사실은 삼강주막은 유행가 가사처럼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주막’이었다. 남의 땅에 건물을 지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유옥연 할머니가 돌아가신 직후 삼강주막이 경상북도 민속자료로 지정되자 예천군은 주막이 위치한 60여평의 땅을 분할 구입해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 166-1’이라는 번지를 새로 부여했다.

문패도 번지도 새로 생긴 삼강주막의 새 주모는 삼강마을 주민들. 녹색농촌체험마을 회원들이 영농법인을 설립해 교대로 주막을 운영하고 있다. 상차림도 유옥연 할머니 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막걸리 한 주전자와 배추전, 두부, 도토리묵이 함께 나오는 ‘주모한상차림’의 가격은 1만2000원. 값도 싸고 옛 정취도 느낄 수 있어 주말에는 2000여명이나 몰려든다.

삼강주막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위치한 지보면소재지에는 예천참우로 유명한 한우고기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청정자연에서 사육한 예천참우는 고기가 부드럽고 값이 싸기로 이름났다. 윤가네한우촌(054-654-9292)은 한우생등심 600g에 2만7000원으로 곁들여 나오는 된장찌개가 맛있다.

예천=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