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적 문체로 고문기술자 가면 벗기기… ‘생강’

입력 2011-03-18 17:29


생강/천운영/창비

소설가 천운영(40)의 두 번째 장편소설 ‘생강’(창비)은 쫓기는 고문기술자 아버지와, 아버지 때문에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된 딸의 심리를 통해 공포와 폭력의 문제를 파고든다. 작품 준비와 취재에만 1년여를 들였다. 지난해 창비문학블로그 ‘창문’에 5개월간 연재한 후 작품을 전면적으로 다듬는 데 또 반년 동안 공을 들였다.

-왜 이 시점에서 우리가 알고 있고, 이미 옛 이야기가 되어버린 한 고문기술자를 연상시키는 소설을 썼는가.

“어느 날 다락방에서 십년을 숨어 지냈다는 한 고문기술자가 나를 끌어당겼다. 사람들은 그를 악마라고 불렀다. 그 악마가 숨어 있는 곳이 꼭 내 다락방인 것 같았다. 그의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 짧지 않은 시간동안 그와 다락방에서 함께 살면서 나는 나를 조금, 아주 조금 더 알게 되었다. 내 속에 숨은 공포를 아주 조금 눈치 채게 되었다.”

-다락방은 어떤 의미인가.

“다락방 때문이었다. 내가 소설을 쓰게 된 것은. 내가 기억하는 모든 것들의 가장 처음인 다락방. 그곳에서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곳에서 이야기들이 시작하고 멈추고 움직이고 끝을 맺었다.”

-고문기술자의 이야기에 왜 ‘생강’이라는 제목을 붙였는가.

“오래전 돌아가신 내 할아버지는 생강 센베이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생강 센베이의 하얀 설탕가루에 속아 덥석 입에 넣었다가 속에 숨은 쌉쌀한 맛에 기겁했던 어린 시절 기억이 났다. 나는 생강이 어른의 음식이라고 생각했었다. 앵에서 앙으로 이어지는 둥글고 어진 촉감이 시옷과 기역의 음가를 가지면서 사각사각한 소리와 상큼한 향기를 갖게 되는 이 어여쁜 생강의 이름으로 소설 한 편을 꼭 쓰고 싶었다. 나는 ‘생강’이 내 첫 소설인 것만 같다.”

소설은 불쑥, 한 남자의 고문 장면을 세밀하게 묘사하면서 시작된다. “칠성판 위에 놈을 눕혀라. 발목을 고정시키고 목까지 받쳐주니 편하지 않겠느냐. 담요를 덮어 비굴한 육체를 감춰 주어라. 피부에 상처가 남는 걸 막아줄 것이다. 뼛속부터 멍들게 하여 폭행의 흔적은 남기지 않을 것이다. 네 개의 띠로 단단히 고정시켜 내 아름다운 칠성판과 하나 되는 영광을 누리게 해주어라.”(9쪽)

그러나 밀실에서의 잔혹한 고문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남자는 조직의 지시에 따라 쫓기듯 도피생활을 시작하고, 그는 도망자이자 추방자의 처지가 된다. 조직이 마련한 은신처인 갱생원을 거쳐 야산 폐가에서의 절대적인 고립을 겪은 남자는 이윽고 아내의 미용실 곁방에 딸린 다락방에 몸을 숨긴다. 그리고 그의 딸 ‘선’이 있다. 소설은 아버지와 딸의 시점을 번갈아가며 진행된다.

소녀는 이제 곧 맞이할 대학생활의 핑크빛 낭만에 한껏 가슴이 부풀어 있다. 그런 딸의 눈앞에 아버지의 행방을 쫓는 낯선 남자가 나타나고, 딸은 자신의 아버지가 고문기술자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어느 날 아버지가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자신의 다락방에서 은신생활을 시작한다. “아버지가 손가락을 입에 갖다붙이며 쉿, 소리를 낸다. 흡, 숨이 멈춘다. 저것은 내 아빠가 아니다. 모나미 볼펜으로 이를 빼주고 다락방에 전기를 연결해주던 기억 속의 아빠가 아니다. 저것은 짐승이다. 저 짐승은 내 아빠가 아니다.”(120쪽)

다락방에 숨은 아버지는 딸의 물건들을 볼모 삼아 필요한 물건들을 딸과 거래하는 기묘한 생활을 지속한다. 하지만 그는 점차 비루하고 치졸한 존재로 추락한다. 그 즈음 딸도 매일같이 미용실 앞에 서서 떠날 줄 모르는 고문피해자 남자의 말을 새겨듣기 시작한다. 마침내 딸은 아버지가 망가뜨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으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이밀며 아버지에게 맞서기 시작한다.

“어느 순간 당신을 똑바로 쳐다보고 싶어졌다. 당신이 그 모든 것이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내 몸이 부서지고 먼지처럼 흩날려 사라진다해도, 당신이 행한 악행과 당신의 악행으로 만들어진 그 모든 것을, 당신의 그 지옥을, 내 몸에 새기기로 했다. 그렇게 감은 눈을 뜨고 막았던 귀를 열었다. 당신을 똑바로 쳐다보기 시작한 순간, 더 이상 당신이 두렵지 않았다.”(236쪽)

가족 서사로 필명을 얻은 작가의 감각적인 문체가 입맛을 돋운다.

정철훈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