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제기는 합니다만 ‘이게 답이야’ 주장은 피합니다”

현암사는 올해로 창립 80주년을 맞았다. 해방으로 우리 말과 글을 되찾은 1945년, 조미현(55) 대표의 할아버지 현암 조상원(1913~2000) 선생이 대구에서 잡지 ‘건국공론’을 창간한 것이 시작이었다. 조 대표는 아버지 조근태(1942~2010) 2대 대표에 이어 현암사를 3대째 운영하고 있다. 최근 서울 마포구 사옥에서 만난 조 대표는 현암만의 전통을 이어가면서 조 대표만의 현암을 꿈꾸고 있었다. 그는 현암사 책의 특징을 균형감에서 찾았다. 앞으로도 계속 지켜나갈 목표이기도 하다. 그는 “현암사에서 내는 책들은 정치색이 없는 게 기본”이라면서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책은 낼 수 있지만 ‘이게 답이야’라고 주장하는 책은 피하고 있다”고 말했다. “어떤 걸 답을 정해놓고 살면 나머지는 다 답이 아니게 되잖아요. 그럼 우리가 그것에 대해서 편견을 갖게 되고 우리의 답대로 상대방을 생각하게 됩니다. 사실 세상은 우리의 생각보다 굉장히 다양하지 않나요.”


‘오늘 조미현’의 뿌리는 3대가 한집에 살았던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 대표는 여덟 살 때부터 조부모와 함께 살기 시작했다. 그는 “어른이 네 분이라 잘못하면 네 분한테 혼나야 하는 엄한 환경이었다”고 했다. 매일 아침 6시에 무조건 일어났다. 방학이라고 늦잠은 꿈도 못 꿨다. 방을 정리하고 씻은 뒤 책상 앞에 앉아 책을 읽다가 식탁에서 앉았다. 편식하거나 밥을 남기는 일은 용납이 안 됐다. 어쩌다 현관에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 놓지 않으면 신발이 사라지기도 했다. 할아버지는 그 시절 자수성가한 사람이 다 그렇듯, 절약이 몸에 밴 분이었다. 겨울이면 실내 온도를 높이는 대신 옷을 여러 겹 껴입고 지냈다.

절약은 결국 함께 사는 환경을 지켜내는 일이다. 아버지도 산을 깎아 만들어야 할 수 있는 골프를 평생 멀리했다고 한다.

조 대표는 “어렸을 때는 늘 불만이었지만 엄격한 ‘훈련’ 덕에 어느새 절약은 습관이 돼버렸다”고 말했다. 지금도 집이건 사무실이건 에어컨은 웬만해선 켜지 않고, 쓰레기 때문에 배달 음식은 시켜 먹지 않는다. 분가한 지난 4년 동안 음식물 쓰레기는 4번만 버렸다고 한다.

아버지가 평생 강조한 것은 ‘중용’이었다. 조 대표는 “아버지는 늘 ‘친구 사귈 때 단점이 보이면 그 단점만큼 장점이 있고, 장점만 있는 것처럼 보여도 단점도 그만큼 있다고 생각하라’고 말씀하셨다”면서 “모든 것을 극단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항상 ‘균형감’을 갖고 생활하라고 하신 가르침을 늘 마음에 새기고 생활한다”고 말했다.


현암사의 사훈은 할아버지 때 ‘신의와 성실’, 아버지 때는 ‘행복지수를 높이는 출판사’였다. 저마다 그 시대의 모습을 반영한다. 조 대표는 2009년 현암사를 맡고 사훈을 ‘더불어 삶, 더불어 책’으로 정했다. ‘더불어’의 신념은 어렴풋이 초등학교 시절의 ‘충격적인’ 경험에 비롯됐다. 그 시절 조 대표는 가난을 집에 TV가 없고 전화기가 없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결석한 친구가 걱정돼 집을 찾았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이었다. 소아마비에 걸린 친구와 할머니 단둘이 살던 그곳은 대낮인데도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깜깜했다. 그가 생각했던 가난과 실제 가난의 괴리에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내가 겪지 않은 세상, 내가 알지 못하는 세상에 사람들은 어떤 불편을 겪고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그때부터 그런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더불어의 삶은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을 정면으로 뒤집는다. 그는 “사촌이 잘되면 기분이 좋아서라도 나한테 밥 한 끼라도 사고 그러는 거 아닌가요”라고 반문했다. ‘현실적인’ 이유도 있다. “이웃이 못 살면 책을 팔 수가 없잖아요. 당장 돈이 없으면 가장 먼저 줄이는 게 문화 생활비 아닌가요.”

초등학교는 공립학교였지만 중학교는 예술학교로 진학했다. 미술 전공이었다. 예술을 좋아하던 아버지와 화가를 꿈꿨지만 형편상 미대에 진학하지 못한 어머니의 영향 때문이다. 더불어의 삶을 즐겼던 조 대표는 중학교 때는 외톨이였다. 나름 부잣집 아이였지만 진짜 부잣집 아이들과는 어울리지 못했다. 공부에도 흥미를 잃고 언제나 책상에 앉아 조용히 책만 읽는 친구였다. 그 시절,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 헤세의 ‘데미안’,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등을 읽었다. 그는 “어려운 책을 읽으면서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싶었던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고 했다. 미술도 흥미를 잃었다. 결국 미술을 포기하고 고등학교는 일반 학교를 선택지만 뒤늦게 다시 미술로 마음을 정하고 대학은 결국 미대였다.


미대 교수가 되고 싶었다. 교수가 돼야 밥벌이를 하면서 작품 활동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당시 교수가 되기 위해서는 유학은 필수였다. 미국에서 어학연수를 받으며 대학원 준비를 시작한 지 6개월 만에 IMF 금융위기 사태가 터졌다. 아버지는 “직원들 급여를 줄 수 없을지도 모르는데 자식이 미국에 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생활비를 끊어 버렸다. 간신히 대학원 입학 면접 때까지 버티던 조 대표는 7개월 만에 결국 한국으로 돌아왔다. 아버지의 반 강압에 현암사 영업부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잠시 일하다 다시 미국으로 갈 것으로 생각하며 큰 고민은 없었다. 그렇게 4년을 일하고 다시 미국으로 가려고 했지만 아버지가 반대했다. 부녀간 냉전을 보다 못한 어머니가 “미국에서 다시 공부하되 돌아오면 현암사에서 일하라”는 중재안을 냈다. 고민 끝에 조 대표는 현암사를 선택한다. 미국행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대신 제대로 출판을 공부하자는 생각에 미국에서 출판경영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조 대표가 현암사를 맡고 1년 만에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막막했다. 과연 리더의 자격이 있는지 스스로 자문할 때도 많았다. 그는 “매번 다르게 마주치는 상황에서 물어볼 데도 없었고, 3대의 무게감은 수시로 짓눌렀다”면서 “어느 날은 사무실에 혼자 앉아, 왜 이 일을 한다고 했는지 후회하며 눈물을 흘릴 때도 있었다”고 말했다. 시련의 시간을 견뎌내게 한 것은 운동과 성경이었다. 피트니스센터에서 근력운동과 유산소 운동을 꾸준히 했다. 조 대표는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을 새삼 실감했다”고 했다. 어린 시절부터 신앙을 가졌던 조 대표는 매일 아침 잠언 한 장씩 읽고 ‘과연 이 자리에 맞는 사람인지’를 묻는 기도를 했다. 처음엔 “회사를 접게 되더라도 직원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망하지만 않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매달렸다. 조 대표는 “어느 순간, 회사의 흥망은 결국 하나님의 소관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면서 “그때부터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나는 할 수 있는 데까지 매일 최선을 다하자는 마음이 생기면서 편안해졌다”고 고백했다.



조 대표 개인이든 현암사는 잠시 휘청했지만, 어느덧 다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조 대표에게 ‘80’의 의미를 물었다. 그는 “나이가 들면서 ‘어른’이 될지, 그냥 ‘노인’이 될지는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라면서 “다만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생각보다 꽤 큰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현암사가 새로운 자극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어느 세대와도 공감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직원들에게나 스스로에게 ’우리 회사가 나이로 치면 팔순이지만, 책은 45세 정도로 만들자’고 당부합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은 나이는 45~50세라고 생각합니다. 현암사는 20대처럼 무모하지도 않고, 50대처럼 너무 안정 지향적이지도 않은, 살짝 불안정하면서도 균형 잡힌 40대 중반의 시각으로 책을 만드는 출판사로 나아갈 것입니다. 현암사의 80년은 완성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맹경환 선임기자 khmae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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