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에게 만나자고 연락했다. 그런데 만나지 않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면목도 없을뿐더러 나를 만나는 게 두려웠다고 했다. 오히려 내가 사정을 했다. “자네를 보고 싶어 그래. 제발 한 번만 만나 주게. 야단치려는 게 아닐세.” 대화를 주고받다가 서울 강남의 R호텔에서 만나기로 했다.
1997년 IMF가 닥치기 전 무더운 7월의 한낮이었다. R호텔 1층 카페에서 기다리는데 초췌한 몰골의 사내가 겨울에나 입을 오리털 점퍼를 입고 노숙자처럼 들어왔다. A였다. 누가 봐도 제정신이 아닌 모습이었다. 그는 어정쩡한 자세로 내게 인사를 한 뒤 앉자마자 눈물을 터트렸다.
“내가 자네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했는지 알지? 나가서 사업을 하려면 잘되기나 할 것이지, 지금 이 꼴이 뭔가.”
A는 연신 죄송하다며 그간의 사연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회장님, 제가 오만했습니다. 고객들이 나를 보고 거래를 한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회장님과 회사를 보고 거래를 이어간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저 심부름꾼에 불과했는데 이걸 몰랐습니다. 헛바람이 들어서 처음부터 사업 크게 하고 사채 빌려 쓰다가 이 모양 이 꼴이 됐습니다. 죄송합니다.”
A를 진정시킨 뒤 다시 물었다. “사채를 얼마나 썼는데?” “5…억입니다….” 기가 막혔다. 당시 5억이면 지금 가치로 50억은 될 것이다. 그걸 갚지 못하게 됐으니 최소 형사고발이었다. 안 그래도 그날 A는 “다음 날 경찰서에 불려 가게 됐다”고 했다.
‘저 인간이 너무 밉지만 그래도 살려야겠다.’ A를 보는데 이런 마음이 생겼다. 인간적인 생각이라면 멱살을 잡고 패대기를 쳐도 시원치 않을 것이다. 그런데 성령 하나님께서 긍휼의 마음을 심어주셨다. 내 인생 최대 원수이자 배신자인 그를 살리기로 다짐했다.
“내일부터 회사 다시 나오게. 그리고 사채 줬다는 그 사람들 나한테 오라고 말하게. 내가 지불 각서 써줄 테니.” 며칠 뒤 A의 빚쟁이들에게 각서를 써주고 몇 년에 걸쳐 사채를 갚아줬다.
A는 회사로 다시 출근하면서 좌불안석이었다. 어느 날엔 A가 물었다. “제가 무엇으로 회장님과 회사에 보답할 수 있겠습니까?” 매해 수십억 원에 달하던 회사의 매출 분야를 단번에 날려 버렸으니 어떻게 이걸 갚을 수 있을까 고민이 컸던 것 같다. 나는 그를 안심시켰다. “그런 건 걱정할 거 없고 내가 새로 시키는 일부터 배우면 되네.” 난 A가 다시 영업하도록 일을 가르치고 새 직무에 그를 배치했다.
A는 회사 안팎에서 자신의 지난 잘못을 인정하면서 신뢰를 찾았다. 이런 모습이 거래처에서도 좋게 보였는지, 서서히 성과가 나기 시작했다.
신앙이 없었던 A는 이제 교회에 다니고 있다. 회사에선 승진을 거듭하여 사장까지 오른 뒤 은퇴했고 지금은 동종업계의 다른 회사 고문으로 일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용서하라 명하시지만 진정한 용서는 우리의 의지만으로는 불가능하다. 먼저 우리를 품으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우리 안에 있어야 한다. 이는 오직 성령님의 도우심으로만 가능하다. 용서하고 품으라는 성령의 감동이 있을 때 우린 그 음성에 순종해야 한다.
정리=이현성 기자 sag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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