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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과 공생 덩치 키우더니… 분쟁 부추기고 경영권 위협

[사모펀드 대해부] ② 벌벌 떠는 대기업


약 40조원의 자산을 운용하는 토종 사모펀드 MBK파트너스가 지난해 말 한국앤컴퍼니(옛 한국타이어 지주사)를 상대로 적대적 인수·합병(M&A)을 시도한 사건은 대기업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토종 사모펀드가 국내 재벌 소유의 경영권을 노릴 수 있는 ‘제2의 한국앤컴퍼니’ 여지를 남겼기 때문이다. 재벌과 암묵적 공생 관계를 유지하면서 덩치를 키워온 토종 사모펀드의 숨겨진 양면성이 드러난 순간이었다.

SK그룹이 가장 걱정하는 시나리오 가운데 하나도 사모펀드의 개입이다. SK는 총수 최태원 회장의 이혼소송 항소심 결과로 지배구조 위기 우려가 일고 있다. 실제 최 회장을 상대하고 있는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 쪽에는 다수의 사모펀드가 붙어 SK 경영권에 대한 협공을 제안하고 있다고 한다.

토종 사모펀드가 대기업 총수도 벌벌 떨게 만드는 존재로 진화했다. 총수 일가의 경영권을 위협하거나, 옵션 계약을 무기로 든든한 지원군에서 한순간에 무자비한 채권자로 돌변한다. 사모펀드가 주요 대기업 계열사를 인수해 직접 경영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그동안 토종 사모펀드는 대기업의 긴급 유동성 공급처를 자처하거나, 상속 및 경영권 방어를 돕는 ‘백기사’ 역할을 수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새 상황이 바뀌고 있다. 이들 펀드는 이익을 내기 위해 다양한 영역에 손을 뻗는 과정에서 산업계 권력 구도 상단에 있는 대기업과 척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이다. 대형화한 사모펀드가 출자자(LP) 구성을 다각화하면서 대기업 이해 관계로부터 독립적으로 움직일 공간을 확보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실제 토종 사모펀드는 재무적 투자에 그치지 않고 경영권을 직접 인수하며 대기업에 대한 지배력을 계속 키워가고 있다. 18일 한국경제인협회에 따르면 2011~2021년 자산 100대 기업에 대한 사모펀드의 보유 지분(21.6%)은 지난 10년간 7.2% 포인트 증가했다. 반면 오너(총수일가 및 특수관계인)의 지분은 43.2%에서 42.8%로 0.4% 포인트 줄었다. 해당 기간 자산 100대 기업 중 10곳의 경영 주체가 바뀌었는데, 이 중 4곳의 새 주인이 사모펀드였다. 롯데손해보험, 유안타증권, 대우건설, SK증권 등은 사명만 봐서는 롯데·SK그룹 계열로 보이지만 사모펀드 주인이다.

사모펀드가 경영권 분쟁에서 밀려난 총수 일가와 협력해 오너를 압박하기도 한다. 박철완 금호석유화학 전 상무는 금호석유화학 지분 9.10%를 가진 단일 최대 주주다. 하지만 박찬구 금호석유화학그룹 회장(6.46%)과 박 회장의 아들인 박준경 금호석유화학 사장(7.65%)에 밀려 경영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사모펀드 차파트너스자산운용이 등장했다. 차파트너스는 지난 3월 주총을 앞두고 박 전 상무와 동맹을 맺은 뒤 금호석유화학 주식 0.03%를 확보하며 주주 지위를 얻었고, 주주 이익 확대를 외치며 주주제안을 했다. 표 대결에서 지면서 실패에 그쳤지만, 대기업 총수와의 전면전도 불사하는 달라진 사모펀드의 면모를 보여준 사례다.

3~4세까지 승계를 거치면서 오너가 지분이 쪼그라들고 있는 대기업은 사모펀드의 이런 행태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오너가 있는 기업에선 경우에 따라 총수 일가에 반격을 가하는 국내 사모펀드의 달라진 움직임을 보면서 이들과의 재무 협력에 회의적인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고 말했다.

대기업들의 자금 조달처 역할을 톡톡히 해온 사모펀드가 옵션 계약을 매개로 기업을 곤경에 빠뜨리기도 한다. 사모펀드 유동성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관행이 재무 부담 부메랑으로 돌아온 셈이다. 투자한 기업이 예상보다 저조한 실적을 거두거나, 약속했던 상장에 실패하면 사모펀드들은 대가를 요구한다. 주로 풋옵션(특정 가격에 주식을 팔 권리)을 행사하는 방식을 통해서다. 풋옵션 행사 과정에서 분쟁이 발생하거나, 유동성 부족 사태가 발생하기도 한다.

최근 신세계그룹은 SSG닷컴을 만들 때 어피너티에쿼티파트너스, BRV캐피탈 등 사모펀드와 맺었던 풋옵션 계약으로 골머리를 앓았다.

두 사모펀드는 2019년 7000억원, 2022년 3000억원을 투자하며 SSG닷컴 지분을 샀다. 양측은 “2023 사업연도에 SSG닷컴이 총매출요건(GMV) 또는 기업공개(IPO) 가능 요건을 충족하지 못할 경우 인수인(사모펀드)은 2024년 5월 1일부터 2027년 4월 30일까지 대주주에게 소유 주식 전부를 매수해 줄 것을 청구할 수 있다”는 데 합의했다. 중국 온라인 유통업체들의 공습, 내수 침체 등으로 사모펀드의 풋옵션 행사 조건이 충족됐고, 신세계의 표정은 굳을 수밖에 없었다. 신세계그룹이 어피너티에쿼티파트너스와 BRV캐피탈매니지먼트가 보유한 쓱닷컴 지분 30%를 제3의 FI에 넘기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하면서 상황은 일단락했지만, 연말까지 새로운 FI를 찾지 못하면 1조1500억원을 주고 SSG닷컴 지분을 인수해야 한다.

어피너티에쿼티파트너스는 교보생명과도 풋옵션 행사를 둘러싼 분쟁을 10년 이상 지속하고 있다. 롯데글로벌로지스와 SK온도 사모펀드의 풋옵션 행사가 재무 부담으로 이어지는 상황을 막으려면 각각 2025년, 2026년 말까지 IPO를 해야 한다.

이남우 한국거버넌스포럼 회장은 “미국 사모펀드는 장기적으로 기업 가치를 몇 배 높인 후 매각을 하는데 한국은 풋옵션으로 시장의 틈새를 파고드는 등 변칙적으로 운영하는 경향이 있다”며 “이런 방식은 장기적으로 기업 가치를 높이자는 원래 사모펀드 취지와는 다르다”고 지적했다.

황민혁 윤준식 기자 okj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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