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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돋을새김] 대통령은 이러나 저러나

이영미 영상센터장


지난달 인천의 한 소방서가 발칵 뒤집혔다. ‘도시락 받은 경위를 해명하라’는 소방본부 지시 때문이었다. 동네 반찬가게 사장님의 도시락 기부 미담이 국민일보 유튜브 채널(KMIB ‘작은영웅’)에 소개된 직후였다. 계획은 익명 배달이었다. 하지만 도시락을 전달받은 소방대원은 “김영란법(청탁금지법)에 걸릴 수 있다”며 주저했다. 결국 사장님이 나섰다. 구매한 게 아니라 직접 싼 도시락이라는 걸 해명한 뒤에야 소방서 측은 사장님 모녀가 새벽부터 준비한 도시락을 받아들였다. 그 도시락이 기어이 탈이 났다. 책임자는 본부까지 불려갔다.

2년 전 ‘김밥 40줄 노쇼 사기’ 서울 김밥집 사연에도 비슷한 뒷이야기가 있다. 사장님이 경찰에 신고하며 “어차피 버릴 김밥이니 나눠 드시라”고 권했다. 보고 있자니 속상하고, 버리자니 40줄 김밥 재료와 노력이 아까웠기 때문이다. 경찰은 거절했다. ‘어차피 버릴’ 김밥조차 현장 경찰에게는 직무 관련 공짜 음식으로 분류됐던 모양이다. 김밥은 버려졌다.

얼마 전 국민권익위의 ‘김건희 여사 명품백 수수 의혹’ 72초 브리핑을 듣다가 인천의 소방대원과 김밥을 거절한 서울의 이름 모를 경찰관을 떠올렸다. 그들은 기자회견을 들었을까. 들었다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우리에게도 담임 교사가 책상 서랍을 반쯤 연 채 학부형을 면담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는 그랬다. 신호위반 운전자가 교통경찰에게, 민원인이 공무원에게 봉투를 내미는 일이 낯설지 않았다. 그런 시대는 지나갔다. 지금의 한국은 동네 주민이 보낸 감사 도시락과 곧 버려질 김밥에도 ‘직무 관련성’을 따지는 나라다. 과하다고 여길 수 있다. 아직 멀었다고 비판할 수도 있겠다. 그래도 이게 평균이다. 공직사회가 내면화한 윤리의식의 현재 수준이다. 공짜로 얻은 게 아니다. 길게는 수십 년, 짧게 봐도 청탁금지법 도입 이후 지난 8년간 몸부림 끝에 우리가 함께 만들어낸 변화였다. 기억하니 부끄러워지는 거다. 그 시절을 겪고 변화를 목격한 세대로서 나는 대통령 부부가 하는 행동과 그 행동을 변호하기 위해 소위 법 전문가들이 국가기관의 권위를 빌려 늘어놓는 논리가 부끄럽다.

명품백 스캔들을 둘러싼 권익위 설명과 경찰 수사, 그간 대통령실·여권 안팎에서 흘러나온 해명은 어느 것 하나 아귀가 맞는 게 없다. 여사가 받은 명품백은 대통령과 직무 관련성이 없다면서 대통령기록물이고, 대통령기록물을 건넨 외국인은 주거침입 혐의로 수사를 받는데, 정작 명품백을 구입한 비용은 한국인이 냈다. 결국 권익위가 도달한 결론이 ‘대통령은 이러나 저러나’ 문제가 없다는 거라니. 현란한 모순에 누군들 어리둥절하지 않을까. 대통령 부인이 명품백을 받는다고 나라가 무너지지는 않는다. 몰라서 다들 화가 난 게 아니다. 고작 그 정도에 지난 수십 년간의 성취가 없던 일이 됐기 때문이다. 그 정도를 무마하자고 공적 자원이 아무렇지도 않게 동원됐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우리 사회가 애써 진전시킨 윤리의식, 그걸 합의하기 위해 쏟은 집단적 노력이 무력화됐기 때문이다. 그것도 최고 권력자에 의해 가장 비교훈적인 방식으로. 가진 권한은 바닥까지 쓴다. 가능한 모든 공적 자원과 시스템을 동원한다. 책임은 상상할 수 있는 최소한으로 축소한다. 형사법적 책임이 아니면 어떤 것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 법적 책임조차 가장 협소하게 해석한다.

모두가 최상층부의 행동 양식을 실시간으로 바라보며 학습하고 있다. 소방대원부터 현장 경찰과 주민센터 공무원까지, 군인부터 교직원과 의사·기자들까지. 권한은 최대로, 책임은 최소로. 조만간 이 시대의 경구가 될 참이다.

이영미 영상센터장 yml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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