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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정임이 사랑한 예술가들… 32년간의 묘지 기행

[책과 길] 모든 것이 거기 있었다
함정임 지음
현암사, 552쪽, 2만9500원

프랑스 남부 세트에 있는 해변의 묘지. 폴 발레리가 잠들어 있다. 스무살 불문학도였던 소설가 함정임은 발레리의 시 ‘해변의 묘지’를 읽고 그곳에 가기를 꿈꿨다. 함정임 제공

스무 살 불문학도였던 소설가 함정임은 폴 발레리가 잠든 프랑스 남부 지중해 ‘해변의 묘지’에 가기를 꿈꿨다. 그리고 스물여덟 살 때 꿈을 이뤘다. 그 이후 32년의 세월 동안 함정임을 사로잡았던 유럽의 시인 소설가 화가 음악가 가수 극작가 영화감독의 생애 공간과 영면처를 찾았다. 책은 이렇게 저자가 직접 찍은 330여 장의 사진과 함께 유럽 예술가들의 묘지 순례기로 엮였다. 단순한 기행문이 아니다. 각각은 예술가들의 미니 평전이기도 하고 때로는 한 편의 단편 소설이기도 하다.


수많은 예술가가 잠들어 있는 프랑스 파리의 몽파르나스 묘지, 그중 가장 먼저 만날 수 있는 장 폴 사르트르와 시몬 드 보부아르의 합장 묘로 시작한다. 둘은 각자의 아파트에 살며 여행을 가거나 호텔 방을 얻을 때면 나란히 각자의 방을 얻고, 수시로 각자의 연인들을 거느리며 51년간 독특한 동거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죽어서는 하나의 묘석 아래 ‘꼼짝없이’ 묶여 있다. 75년의 생애 동안 철학가 소설가 문학평론가 극작가 등으로 활동한 사르트르는 “가장 인간을 이해하고자 애쓴 사람”으로 정의된다. 후배 대가들의 영원한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질 들뢰즈는 “다행히 우리에게는 사르트르가 있었다”고 고백했고, 젊은 시절 함정임에게 사르트르를 일깨워 준 문학사가 김윤식은 “외국의 최신 이론을 접할 적마다” 사르트르를 생각하면서, 사르트르라면 “이런 이론을 무어라고 할까”라고 “물음도 탄식도 아닌 신음소리를 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음”을 토로했다. 함정임은 매년 몽파르나스 묘지의 푸른 문으로 들어가 오랜 시간 묘 곁에 머문다. 때로는 작고 싱싱한 꽃을 갖다 놓기도 하고 때로는 묘 앞 의자에 앉아 편지지 한 귀퉁이를 찢어 “사르트르씨 또 다녀갑니다”라고 인사말을 남겨놓기도 한다.

몽파르나스에는 어머니 사랑을 독차지했다가 어머니의 재혼으로 고립된 운명을 맞닥뜨렸던 샤를 보들레르의 묘도 있다. 대학 시절 “평생 지고 가야 할 보들레르라는 병을 지병으로 얻었다”는 함정임은 밤이면 밤마다 “천 년을 산 것보다 더 많은 추억”을 동경하며 지금 “여기가 아니라면 그 어디라도”를 꿈꾸곤 했다. 보들레르는 그의 시 ‘즐거운 주검’에서 “유언도 싫고 무덤도 싫다”고, “죽어서 남들의 눈물 빌기보다는 차라리 살아서 까마귀 불러 쪼아 먹히”고 싶다고 했지만, 어머니가 재혼한 자크 오픽 대령 가문의 묘에 묻혔다.

함정임의 발길은 프랑스의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는 대문호 빅토르 위고와 불의한 권력에 맞서 싸웠던 작가이자 언론인 에밀 졸라의 묘가 있는 국립묘지 팡테옹, 누벨 바그 영화의 기수 프랑수아 트뤼포가 묻혀 있는 몽마르트, 그룹 도어스의 짐 모리슨과 프랑스의 국민가수 에디트 피아프의 페르 라셰즈 묘지를 거쳐 해변의 묘지에 다다른다.

프랑스 파리 몽파르나스 묘지의 장 폴 사르트르와 시몬 드 보부아르의 합장 묘. 함정임 제공

함정임은 “오래전 폴 발레리의 시 ‘해변의 묘지’에 홀려 비행기를 탄 적이 있다”면서 “시로써 완벽한 죽음, 그리하여 생성되는 삶을 꿈꾸던 한 시인의 돌무덤을 향하던 길이었다”고 했다. 프랑스 남부 도시 세트에 도착해 해변의 묘지로 이어지는 입구에 자리 잡은 호텔에 묵었다. 발레리의 묘를 찾아 나서고 위치를 찾기 위해 묘지 안내인에게 묻자 약도는 없고 사이프러스 나무를 찾아가라고만 했다. 한참을 헤매다 찾은 발레리는 보들레르와 마찬가지로 가족묘에 영면해 있었다. 발레리의 이름은 가족들의 이름과 생몰 연대가 새겨진 묘석의 테두리에 그늘져 있었다. 함정임은 “발레리와 마주한 몇 분의 짧은 시간이 영원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고 썼다. 현기증에 휩싸여 묘석에 걸터앉았을 때 환청처럼 등 뒤에서 한 영혼이 그의 빈약한 어깨를 어루만지듯 말을 걸어왔다. “나는 순수한 너를 너의 제일의 자리로 돌려놓는다. 스스로를 응시하라.”(‘해변의 묘지’ 중)

프랑스를 떠나 이탈리아와 그리스, 체코와 독일, 오스트리아 등을 둘러본 뒤 32년의 여정을 마치며 함정임은 말한다. “나는 무엇을 바라 청춘 시절부터 그 오랜 세월, 그 먼 길을 헤매어 다녔던가. 지나고 보니, 그것은 사랑, 불멸이었다. 모든 것이 거기 있었다. 그게 다였다.”

맹경환 선임기자 khmae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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