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엔저로 가난해진 일본인 “싸구려 나라 됐다”

수입품 가격 올라 실질소득 감소
학교급식 미국산 소고기 빠지고
값싼 엔화로 ‘오버투어리즘’ 몸살
관광객에 이중가격제 도입 논란도

게티이미지뱅크

역대급 엔저를 일컫는 ‘슈퍼엔저’가 장기간 유지되면서 일본 국민의 삶이 팍팍해지고 있다. 일본 엔화 가치가 떨어지면 수출 시장에서 자동차 철강 등 일본 기업들의 가격 경쟁력은 높아지는 반면 수입품 가격 급등으로 임금이 물가 상승을 따라가지 못하면서 일본 국민들의 삶은 그만큼 가난해졌다. 일본은 디플레이션(경기 침체 속 물가 하락)을 탈피하기 위해 정책적으로 마이너스(-) 금리를 유지해왔다. 지난 3월 통화정책 정상화를 위해 금리를 올리면서 8년 동안 유지했던 마이너스 금리에서 벗어났다. 금리 방향을 달리 했음에도 아직 엔화 가치는 오를 기미가 없다. 지난 4월 29일에는 달러당 엔화가 장중 160엔까지 올라 일본당국이 외환시장에 개입했다. 다만 근본적인 처방은 되지 못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급식서 사라진 소고기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일본 미야기현 도미야(富谷)시 초 중학생 5800명분의 식사를 조리하는 급식센터가 최근 메뉴에서 소고기 반찬을 뺐다고 지난 3일 보도했다. 슈퍼엔저로 미국산 소고깃값이 크게 올라서다. 4일 기준 일본에서 미국산 소고기 1kg 도매가는 1450~1530엔(1만2770~1만3480원)으로 전년보다 80% 넘게 뛰었다. 1991년 수입자유화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다. 일본의 소고기 수입 업체는 미국 생산자에 할인을 요청했지만 “할인은 어렵다. 엔화는 일본 측 문제다”라는 답변을 받았다.

엔화 가치가 낮아지면 미국산 소고기 등 수입품을 사는데 예전보다 부담이 커진다. 10일 외환시장에 따르면 이날 엔 달러 환율은 156.83에 마감했다. 올해만 11.36% 올랐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주요국 모두가 저금리였던 2021년 1월 2일(103.23엔) 대비 51.81% 올랐다. 이는 엔화 가치가 3년여 만에 미국 달러 대비 51.81% 떨어졌다는 뜻이다.


슈퍼엔저 장기화로 일본 내에서는 ‘싸구려 일본(야스이 닛폰)’이라는 표현도 등장했다. 당초 일본의 저임금 문제를 가리키는 표현이었지만, 최근 슈퍼엔저에서 외국인 관광객에게 일본이 ‘싸서 가는’ 국가가 된 상황을 자조하는 표현이다. 일본 경제계를 대표하는 게이단렌의 도쿠라 마사카즈 회장은 최근 정례 기자회견에서 “일본이 이 정도로 ‘싸구려 일본’은 아니지 않나”라며 “일본 국력을 보여주는 지표가 환율이다. 현재 엔저는 과도하다”고 말했다.

엔저가 유발한 ‘싼 맛’에 일본에 외국인 관광객이 일본에 몰리는 오버투어리즘(관광 공해)을 지적하는 현지 언론 보도도 많다. 니혼게이자신문에 따르면 일본 라면 평균 가격(880엔)은 미국 뉴욕(3100엔)의 3분의 1도 안 됐다. 관광 수요가 밀어 올린 물가가 내국인에게 부담스러워진 것도 문제다. 일부 가게는 외국인 관광객에게 1인당 500~1000엔가량 웃돈을 받고 일본인은 가격을 할인해주는 ‘이중가격제’를 도입해 논란이 됐다.

“이달도 금리 인상 안 한다”

일본은행(BOJ)은 지난 3월 19일 -0.1%였던 기준금리를 0~0.1%로 전환해 마이너스 금리 정책을 종료했다. 1990년부터 ‘잃어버린 30년’이라 불리는 경기 침체에 빠진 일본은 2016년 2월부터 단기 정책 금리를 -0.1%로 확정해 8년 넘게 유지해왔다. 일본은행은 “최근 임금이 상승하고 물가가 오르는 선순환 강도가 강화되고 있다”며 마이너스 금리 종료 배경으로 설명했다.

다만 여전히 미국(연 5.25~5.50%)과 비교할 때 낮은 수준이다. 매월 6조 엔(약 52조9000억원) 규모의 국채 매입도 유지하고 있다. 금융정책 전환에 나섰지만 당분간 엔저가 유지될 것이라는 예상에 엔·달러 환율이 튀어 오르기도 했다. 엔 달러 환율은 지난 4월 29일 장중 160엔을 돌파했다. 일본 당국이 곧바로 개입해 151엔까지 내려갔지만, 재차 상승해 현재는 156엔(10일 기준) 부근에서 거래되고 있다.

일본 재무성은 지난 4월 26일부터 5월 29일까지 약 한 달간 9조7885억 엔(약 86조원) 규모로 개입했다고 지난달 31일 발표한 바 있다. 다만 당국의 개입만으로는 엔화 약세 흐름을 막을 수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미국과의 기준금리 격차가 좁혀지기 전까지는 어렵다는 것이다.

미국의 금리 인하 기대감도 후퇴하고 있다. 7일 미국 노동부가 발표한 5월 미국 비농업 일자리가 전월 대비 27만2000명 늘어 다우존스 전망치(19만 명)는 물론 직전 12개월간 평균 증가 폭(23만2000명)도 웃돈 것으로 나타났다.

일본은행이 금리를 올리는 방법도 있으나 현재로서는 가능성이 크지 않은 것으로 파악된다. 산케이신문은 9일 일본은행이 오는 13~14일 개최하는 6월 금융정책결정회의에서 금리를 인상하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고 보도했다. 물가와 임금 상승이라는 경제 선순환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이번 회의에서 금리 인상을 미룰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동시에 장기 국채 매입 규모를 줄일지가 초점이라고 산케이는 전했다. 금리를 인상하지 않더라도 국채 매입액이 줄면 시장 금리가 올라 엔저에서 벗어날 수 있다. 산케이신문은 일본 증권업계 관계자를 인용해 “일본은행이 월 5조 엔(약 44조원) 정도로 (국채 매입액을) 낮출 가능성이 있다”면서도 “엔화 약세를 막는 효과는 매우 한정적일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광수 기자 g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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