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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샛강에서] 선교 140주년, 우리의 과제는 뭘까

장창일 종교부 차장


역사에 남은 종교개혁가가 독일의 마르틴 루터나 스위스의 장 칼뱅에게만 국한되는 건 아니다. 체코의 종교개혁자로 성서를 유일한 권위로 강조하고 세속화한 성직 권력을 비판하다 1414년 콘스탄츠 공의회에 소환돼 사형당한 얀 후스의 희생도 잊을 수 없다.

15세기 말 피렌체에서도 가톨릭교회의 거대한 권력 앞에 항거했던 개혁자가 있었다. 일생 교회 개혁에 헌신했던 설교자 지롤라모 사보나롤라(1452~1498)다. 그는 1498년 5월 23일 두 명의 도미니크회 수도사들과 함께 시뇨리아 광장에서 화형당했다. 1494년 8월 프랑스가 이탈리아를 침공하자 도시국가 피렌체는 혼란에 빠졌다. 경제적으로 부강했던 피렌체가 갖지 못한 건 군대였다. 자신의 힘으로 프랑스군을 막을 힘이 없던 피렌체는 서둘러 협상단을 구성했고 사보나롤라가 이들을 이끌고 프랑스 왕 앞에 섰다.

대군을 거느리고 피렌체를 침공한 프랑스 샤를 8세 앞에서 사보나롤라는 감동적인 연설을 시작했고 피렌체를 굴복시키려던 왕은 감동해 마음을 돌렸다. 사보나롤라의 연설이 얻은 결실은 컸다. 그는 시민들에게 인정받아 순식간에 피렌체의 실세가 됐다. 하지만 그는 세속 권력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대신 교황청을 향한 개혁 의지를 꺼내들었다. 개혁을 향한 권력을 쥔 사보나롤라는 허다한 부조리를 제자리로 돌리기 위해 노력했다. 날카로웠던 그의 설교는 시종 교황청을 향했다. 견디다 못한 교황청은 오히려 추기경직을 제안하며 달랬지만 사보나롤라의 개혁은 멈출 줄 몰랐다.

추기경직 제안에 “추기경의 모자가 아니라 나는 순교의 피를 원한다”고 답했다. 교황청이 꺼낸 두 번째 카드는 피렌체의 시민이었다. “사보나롤라를 로마로 보내지 않으면 시민 재산에 타격을 입히겠다.” 피렌체가 가장 지키고 싶어 했던 그들의 재물을 건드린 셈이었다.

겁먹은 시민들은 빠르게 움직였고 결국 자신들을 잔인한 약탈에서 구한 사보나롤라에게 화형을 선고하고 말았다. 사형 선고와 집행이 고작 하루 만에 진행됐을 정도로 피렌체의 두려움은 컸다. 역사가들은 힘을 가지지 못한 개혁이 얼마나 취약한지 보여주는 사례로 사보나롤라의 죽음을 꼽는다. 그가 피렌체를 구했을지언정 자신을 지킬 힘이 없었던 건 큰 한계였다. 마키아벨리는 “무장한 예언자만이 권력을 쟁취할 수 있다”고 그의 죽음을 평했다.

그의 사후 384년이 지난 1882년, 피렌체시는 사보나롤라를 추모하는 동상을 세웠다. 1901년에는 기념 메달을 만들어 그가 화형당했던 자리에 헌정했다. ‘1498년 5월 23일. 이곳에서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수도사가 도미니크 수도사 및 실베스트로 수도사와 함께 부당한 판결로 교수형을 받은 뒤 화형에 처해졌다. 4세기 후 추모의 뜻을 담아 이 기념비를 세운다.’

긴 세월이 지나 제대로 된 평가를 받았지만 종교개혁가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시대의 변화를 늦췄으며 구태를 연장시켰다. 인류의 긴 역사에는 이처럼 안타까운 죽음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사보나롤라처럼 뒤늦게 재평가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이슬로 사라지고 만다.

한국 개신교의 문을 연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는 1885년 부활절 인천항에 도착한다. 그들의 헌신적 사역은 수많은 청년들이 미지의 땅의 선교사로 헌신하는데 결정적인 동기부여를 했다. 내년이면 우리나라에 복음이 심긴 지 140주년이 된다. 긴 기간 이 땅의 복음은 온전하게 심기고 큰 숲을 이뤘을까. 아쉽게도 우리 주변에는 개혁해야 할 과제가 여전하다. 선교 140주년을 앞두고 축제로만 기념할 게 아니라 ‘추기경의 모자가 아니라 순교의 피를 원한다’고 외쳤던 종교개혁자의 정신을 다시 한번 되새겨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장창일 종교부 차장 jangc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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