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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로 아름답네… 150여년 자수의 역사

규방 취미에서 애국심 자수로 추상 미술까지…

덕수궁 ‘한국 근현대 자수’展

김혜경의 이대 자수과 졸업 작품 ‘정야’(1949, 비단에 자수, 92×66㎝). 당시 이대 미대 교수인 서양화가 김인승에게 밑그림을 받아 제작됐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정신적 심연을 검은색으로 뒤덮어 추상적으로 표현한 것 같은데, 유화가 아니다. 굵은 마대 천에 모직 실로 기웠다. 군데군데 천이 드러나 상처를 은유하는 듯하다. 비엔날레에서나 볼 법한 이런 추상적인 작품(송정인 ‘작품 A’)을 자수 전시에서 만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하는 ‘한국 근현대 자수: 태양을 잡으려는 새들’전이 화제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자수 전시를 꾸리는 것도 처음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얼마나 한국의 자수 문화에 무심했는지 돌아보게 한다는 점에서 죽비 같은 전시다.

전시는 구한말 이후 현재까지 150여년에 걸친 한국 자수의 역사를 통시적으로 들여다본다. 비단에 꽃과 나비를 수놓던 ‘규방 자수’가 상징하듯 양반가 고급 취미로 여겨지던 자수는 격변기를 통과하며 수시로 국위를 선양하는 관광 상품으로 불려 나왔다. 또 실험적인 예술을 시도하는 송정인의 이 추상작품이 보여주듯 돈벌이 수단을 넘어 새로운 예술을 꿈꾸던 자수하던 여성 예인들의 내면도 읽을 수 있다. 미국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일본민예관 등 국내외 60여 기관과 개인 소장품 등 200여점이 나왔다. 한국 자수의 역사를 키워드로 풀어본다.

1. 개항: 상류층 ‘럭셔리 취미’ vs 만국박람회 수공품

숙종 때부터 본격화된 자수는 19세기까지는 양반가 여성만이 누릴 수 있는 계급 표식의 취미였다. 경제력도 필요했지만, 막일하는 손으로는 비단 천과 비단 실을 만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19세기 말부터 신분제가 흔들리고 상업이 발달하면서 돈이 있는 상류층의 여성이라면 즐길 수 있는 럭셔리 취미로 확장됐다. 전시를 기획한 박혜성 학예연구사는 “자수는 이처럼 잉여적 취미라는 게 나전칠기 등 다른 공예와 다른 점”이라고 강조했다. 당시 기명절지도, 십장생도 등 부유층에게 인기 있던 회화 소재가 자수로도 제작됐다.

자수는 외국인에게 자랑하던 수공품이기도 했다. 1893년 제1회 시카고만국박람회에 출품돼 자개장과 함께 외국인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자수가 산업으로 인식되며 여성의 전유물이었던 자수 시장에 남성도 가세했다. 남성 수사(繡師) 안제민(1863∼1917 이후)은 실을 꼬아 두텁게 만든 특유의 꼰사를 사용해 입체감을 한껏 살렸다. 당시 안제민의 화조도 병풍을 주문하려면 작은 집 한 채 값은 치러야 했다.

2. 일제강점기: 현모양처의 기예 & 기술에서 ‘표현’으로

20세기 초 근대 교육이 시작되면서 자수는 공교육체계에 편입됐다. “안으로는 현모양처가 되고 밖으로는 문명을 보완하는 기술자 및 교육자를 양성하기 위해서”다. 부유층 여성 자제들이 유학하던 일본 동경의 여자미술전문학교(현 여자미술대학)에서 자수를 전공한 여성들이 배출됐다. 박을복, 나사균(나혜석의 조카) 등이 자수를 전공했고, 이들은 귀국 후 교편을 잡으며 한국에 새로운 자수 문화를 보급했다. 조선총독부가 주최하는 조선미술전람회는 1932년인 제11회부터 ‘서예부’를 폐지하고 공예부를 신설했는데, 이를 통해 자수는 드디어 미술로 대우받기 시작했다. 박을복이 조선미전에서 입선한 ‘국화와 원앙’(1937)를 볼 수 있고, 숙명여고보생 20여명이 3년에 걸쳐 공동 제작한 대형 자수 병풍 ‘등꽃 아래 공작’(1939)은 당시 자수가 갖는 시대적 의미를 짐작하게 한다.

3. 해방 이후∼1960년대: 사실주의 & 추상의 광풍

해방과 함께 한국에도 미술대학이 생겨났다. 이화여대 미술대학에 자수과가 설치됐다. 숙명여대에서는 가정과 안에 자수 전공이 있었다.

미술로서의 자수의 양식은 사실주의미술에서 추상미술까지 스펙트럼이 넓었다. 이대생이던 김혜경(1928∼2006)이 이대 교수 김인승에게 밑그림을 받아 자수를 놓은 작품은 사실주의 유화 작품을 보는 듯 섬세하기 그지없다. 당시 한국화가 박래현 등이 피카소의 입체주의 영향을 받은 작품을 그렸는데, 자수에서도 이런 입체파 경향을 볼 수 있다. 자수는 회화의 경향과 함께 움직였던 것이다.

송정인의 추상 자수 ‘작품 A’(1965, 마대에 염색과 자수, 170×313㎝).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압권은 추상 작품이다. 1960년대 초반 미술계에는 유럽의 앵포르멜 미술의 영향을 받아 추상화의 광풍이 풀었다. 송정인(87)의 ‘작품 A’(1965)는 그런 추상화의 경향을 온몸으로 받아들였음을 입증한다.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 당선되기도 한 송정인은 독학으로 그런 위업을 일궜는데, 순수 예술가로도 재조명돼야 한다. 그가 만든 상업적인 자수 병풍은 외교관이나 주재원 부인들에게 사랑받았다.

4. 60·70년대 이후: 전통의 부활 & 수출의 첨병

정영양의 ‘통일-무궁화’(1968, 비단에 자수, 215.3×489㎝).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60년대를 이은 70년대는 자수의 전성기였다. 부활시켜야 할 전통으로 자수가 다시 불려 나오고 상품으로서도 국내 시장은 물론 해외 시장에서도 인기 있었다. 이는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시대 양면의 얼굴이었다. 박정희 집권기 키워드는 경제와 애국이었다. 무궁화를 10폭 병풍으로 수놓은 ‘통일(무궁화)’은 그런 시대상을 반영한다. 집단 제작된 자수는 일본에 수출되며 산업 전사 역할을 했다. 이농 물결 속에 향수를 달래는 청전 이상범의 산수화 등을 밑그림으로 한 자수 병풍은 부잣집 인기 혼수 품목이었다. 전통이 강조되며 한상수(1932∼2016)가 1984년 자수장으로는 최초로 국가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

80년대까지도 결혼 혼수 품목으로 인기를 끌던 자수는 이후 기계화, 값싼 중국 자수의 등장, 아파트 문화의 보편화 등 여러 요인이 겹치며 점점 미술과 일상의 주변으로 밀려났다. 전시는 8월 4일까지.

손영옥 미술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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