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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룸에서] 팬덤밖에 난 몰라

임성수 사회부 차장


‘술 취한 그날 밤 손등에 눈물을 떨굴 때 내 손을 감싸며 괜찮아 울어준 사람…당신을 만나서 고맙소’. 트로트에도, 김호중씨에게도 별 관심이 없던 기자였지만 김씨가 커버한 노래 ‘고맙소’(원곡가수 조항조)는 꽤 근사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김씨의 음주운전 뺑소니 사건이라는 범죄 누아르 같은 맥락이 들어가자 이 노래는 전혀 다른 의미로 들린다. 김씨의 범법 행위와 팬덤 일부가 보여주는 뒤틀린 사랑이 생각나서다.

김씨는 지난 21일 경찰 조사를 받고 나오면서 “죄인이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라고 했다. 그런데 이 죄인, 입으로만 죄인이지 행동은 전혀 죄인 같지 않았다. 경찰 출석부터 비공개였다. 웬만한 재벌도 물의를 일으키면 포토라인에 서서 사죄의 말을 한다. 하지만 김씨는 경찰서 주차장으로 몰래 출석했다. 김씨는 조사 뒤에도 취재진을 피하겠다며 6시간 넘게 경찰서 안에서 버텼다. 구속영장까지 청구돼도 공연을 강행했다. 김씨는 지난 23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에서 ‘월드 유니온 오케스트라 슈퍼클래식: 김호중 & 프리마돈나’라는 거창한 이름의 공연을 예정대로 소화했다. 24일 공연까지 강행하려 했지만 같은 날 잡힌 영장실질심사로 좌절됐다. 음주운전으로 시작된 온갖 범죄 정황이 다 드러나도 구속 직전까지 노래를 부르면서 공연 수입을 올린 것이다. 검찰총장 직무대행까지 지낸 초호화 전관 변호사에게 수임료를 지급하려면 그렇게라도 돈을 벌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변호인조차 김씨 구속을 막아주진 못했다.

김씨 사건은 흔한 음주운전 사건이 아니다. 김씨와 주변인들은 범죄 드라마에서 볼 만한 행동으로 종합적인 사법 방해를 했다. 김씨는 음주사고 현장에서 곧바로 경기도의 한 호텔로 도주했고, 소속사 관계자가 김씨 옷을 입고 가짜 자수를 했다. 사건 현장이 담긴 차량 블랙박스 메모리카드는 다 사라졌다. 소속사 관계자는 “삼켜 버렸다”고 한 것으로 전해졌다. 인명 피해가 없었던 사고인데도 법원이 구속영장까지 발부한 것은 김씨 측이 이렇게 조직적으로 사건을 은폐하려 했기 때문이다.

김씨가 이런 범죄에 연루되고도 구속 직전까지 노래를 부를 수 있었던 건 팬덤의 힘이다. 사건 후 김씨 모교가 있는 경북 김천시에 ‘김호중소리길’ 철거가 검토된다고 하자 극성팬들은 “유죄 확정도 아닌데 왜 철거하느냐”고 반발했다. 구속 후에도 일부 팬덤은 성명을 내고 “정치권 이슈를 은폐하기 위한 용도가 아니었기를 바란다”는 이해하기 어려운 주장을 했다. 정치권이 김씨에게 음주운전을 시키고, 증거인멸을 교사했다는 말인가? 막 나가는 트로트 스타 뒤엔 무슨 짓을 해도 싸고도는 어둠의 팬덤이 있다.

연예인을 지지하든 정치인을 지지하든 팬덤이 냉철하고 객관적이긴 어렵다. 팬덤(Fandom)의 어원 자체가 광신자를 뜻하는 ‘Fanatic’과 영지·나라를 뜻하는 ‘Dom’에서 나왔다. 팬의 사랑은 애초에 어느 정도 맹목적인 구석이 있다. 그래도 용인할 수 있는 법적·도덕적 한계선은 있어야 할 것이다. 김씨의 일부 팬덤은 그 한계를 일탈했고 김씨는 그런 팬덤을 믿고 방종했다. ‘술 취한 그날 밤’ 운전대를 잡았다가 도주한 김씨에게 ‘괜찮다’가 아니라 ‘잘못했다’고 꾸짖는 팬들이 있었다면, 김씨가 영장심사 당일에도 공연을 강행하려 할 때 ‘이건 아니다’며 공연을 거부하는 팬들이 더 많았다면 김씨가 쌓아 올린 커리어가 이렇게 비참하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김씨가 ‘고맙소’를 다시 부를 수 있을까. 이 노래를 다시 듣는 팬은 음주 뺑소니 이전과 같은 감정을 그대로 느낄 수 있을까.

임성수 사회부 차장 joyls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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