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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이혼했어도 ‘혼인무효’ 가능… 대법, 40년 만에 판례 변경

‘합의 없는 결혼’ 등 사유 인정 땐
혼인 없었던 일로 하는 길 열려
이혼해도 前배우자 빚 연대책임 등
불이익 겪는 이들에게 큰 의미

연합뉴스TV 제공

합의 없이 결혼했다는 사유 등이 인정된다면 이혼한 후에도 혼인 자체를 없었던 일로 만들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기존에는 이혼을 했다면 혼인을 무효로 하는 게 불가능했는데 대법원이 40년 만에 판례를 변경한 것이다. 잘못된 혼인 사실을 가족관계등록부에서 수정하지 못했던 당사자들의 권리구제가 가능해졌다는 평가다.

조희대 대법원장 취임 후 5개월 만의 첫 전원합의체 판결이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노태악 대법관)는 23일 A씨가 전남편을 상대로 낸 혼인 무효 청구 소송에서 대법관 전원일치 의견으로 원심판결을 파기 자판(스스로 판결)하고 사건을 1심으로 돌려보냈다. 1심에서 소송 이익이 인정되지 않아 각하됐기 때문에 1심부터 A씨의 혼인 무효 사유가 인정되는지를 다시 따져보게 된다.

원고 A씨는 2004년 이혼한 뒤 2019년 무효 소송을 제기하면서 “혼인 의사를 결정할 수 없는 극도의 혼란과 불안 강박 상태에서 실질적 합의 없이 혼인신고를 했다”고 주장했다.

혼인 무효는 결혼 자체를 없었던 일로 만들기 때문에 이혼과는 법적 효과가 다르다. 민법 815조는 당사자 간 혼인 합의가 없었거나 근친혼이면 혼인을 무효로 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범죄나 가스라이팅 등에 의해 실질적 합의 없이 이뤄진 결혼이 무효가 될 수 있다. 과거 ‘계곡 살인’ 사건을 저지른 이은해의 남편 윤모씨 유족들이 제기한 소송에서 법원은 “이씨에게 참다운 부부 관계를 바라는 의사가 없었다”며 혼인 무효 판결을 내린 바 있다.

다만 1984년 대법원은 이미 이혼한 부부의 경우 혼인 관계가 해소됐으므로 무효로 할 수 없다고 판결했고, 판례가 40년간 유지됐다. 이혼 전에는 혼인 무효 청구가 가능하지만 이혼 후에는 불가능했던 것이다.

대법원은 판례를 뒤집으면서 “혼인 상태에서 발생한 법률관계는 이혼 후에도 유효하기 때문에 혼인 무효를 구할 실익이 존재한다”고 밝혔다. 혼인 관계를 전제로 수많은 법률관계가 형성되는 만큼 일일이 효력을 따지기보다 혼인 자체의 무효를 구하는 게 분쟁 해결에 유효 적절한 수단일 수 있다는 판단이다.

구체적인 예로 대법원은 일상가사채무에 대한 연대책임 문제를 제시했다. 만약 혼인 상태에서 생활비에 쓰려고 한 명이 타인에게 돈을 빌렸다면 배우자도 빚에 연대책임을 져야 한다. 빚을 갚지 않고 이혼해도 배우자에게는 연대책임이 남는다. 반면 혼인 무효가 되면 채무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다.

기존 판례에서 “단순히 이혼한 것처럼 호적상 기재돼 불명예스럽다는 사유는 현재 법률관계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밝힌 부분도 변경됐다. 대법원은 “가족관계등록부의 잘못된 기재가 단순한 불명예이거나 간접적 사실상 불이익에 불과하다고 보고 확인의 이익을 부정하는 건 혼인 무효 사유 존재에 관한 법원 판단을 구할 방법을 막아버리는 것”이라고 밝혔다. 실제 혼인 무효 사유가 인정되는지는 개별 재판에서 따져봐야 한다는 취지다.

대법원 관계자는 “국민의 생활 관련 분쟁이 실질적으로 해결될 수 있도록 권리구제 방법을 확대했다”고 설명했다. 가정법원 판사 출신 이현곤 변호사는 “실제 혼인 생활을 하지 않았는데 졸지에 이혼 상태가 돼 불이익을 겪게 된 당사자들에겐 큰 의미가 있는 판결”이라며 “혼인 사실은 이유를 불문하고 유지돼야 한다는 게 과거의 보수적 혼인관이었는데, 달라진 시대상을 반영한 판결로도 해석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양한주 기자 1week@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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