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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윤의 딴생각] 엄마는 파이어족


“없는 놈이랑 결혼하느니 차라리 혼자 살고 말지!” 고등학생 때부터 가까이 지내온 친구가 착하고 성실하지만 재산은 없는 남자와 백년가약을 맺게 됐다는 소식을 전하자 엄마가 칠색 팔색을 했다. “걔는 왜 골라도 그런 남자를 골라, 고르기는. 그렇게 안 봤는데 헛똑똑이야 아주.” 나는 식장이 어디인지 알려주기라도 하면 그곳까지 한달음에 달려가 “이 결혼 무효야” 하며 난동을 부릴 기세로 펄펄 뛰는 엄마에게 핀잔을 줬다. 친구네 부모님도 가만히 계시는데 엄마가 왜 난리냐고 말이다. 하지만 없는 남자와의 결혼을 극구 반대하는 엄마를 이해 못하는 건 아니다.

엄마는 없어도 너무 없는 남자와 결혼해 딸 셋을 낳았다. 언젠가, 어째서 그다지도 무모한 일을 벌였느냐 물으니 “몰라서 그랬다”고 엄마는 말했다. 이제 막 스물을 넘긴 여자가 세상 물정을 모르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으나 그 대가가 너무 컸다. 남편이 벌어오는 돈만 믿고 있다가는 배곯기 십상이었으므로 엄마는 두 팔 걷어붙이고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그 생활은 오래 이어졌다. 막내인 내가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야 전업주부의 삶을 살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 시절 어머니들이 다들 고생했다고는 하지만 나는 유독 우리 엄마가 안쓰럽다.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짙은 나와 꼭 닮은 엄마가 당신을 희생해 가며 세 자매를 키워낸 건 그야말로 인간 승리다.

어쨌거나 승리를 거둔 것은 기쁜 일이지만 엄마는 영광의 상처를 얻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나도 하지 못한 채 젊은 날을 보낸 탓에 가슴에 한이 맺혀버리고야 만 것이다. 엄마는 그 응어리를 풀어내려는 듯, 문화센터에서 댄스·수영·골프·요가·필라테스·일본어 수업을 섭렵하며 나름대로 즐거운 노년을 보내고 있다. 그런데도 지난날의 고생이 불현듯 가슴을 스치는 날이면 골백번도 더 들은 그 시절의 이야기를 지칠 줄도 모르고 뽑아낸다. “엄마가 옛날에…”로 시작하는 그 한 맺힌 소리로 ‘엄마가’를 만들어 판소리 무대에 세워도 손색이 없을 지경이다.

엄마의 신세 한탄은 때를 가리지 않는다. 얼마 전, 친구들과 부산 여행을 간다는 이야기를 꺼내면서도 “엄마가 옛날에 너희 키운다고 여행 한번 못 가봤잖아” 하며 ‘엄마가’의 시작을 알렸다. 그냥 기분 좋게 다녀오면 될 걸 엄마는 왜 꼭 저 얘기를 꺼내지 못해 안달일까. 언니도 이런 나와 같은 마음이었는지 엄마의 말을 끊으며 퉁을 놓았다. “엄마, 오십에 일 그만뒀고 이제 칠십이야. 이십년을 자유롭게 살았다고. 그러니까 이제 그만 좀.” 하지만 엄마는 이에 굴하지 않고 “엄마가 너희들 키우다 보니까 벌써 이렇게 늙었네” 하며 ‘엄마가’의 2막을 열었다. 이대로 듣고 있을 수만은 없지. 이번에는 내가 엄마의 말을 가로챘다. “그러고 보니까 엄마 파이어족이네.”

그런 단어는 난생처음 들어본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는 엄마에게 나는 말했다. ‘파이어(FIRE)’는 ‘Financial Independence Retire Early’의 약자다. 경제적으로 자립해서 일찍 은퇴한다는 뜻인데 이러한 삶을 꿈꾸는 사람을 ‘파이어족’이라고 한다. 대다수의 젊은 사람들이 목표로 삶는 인생이다.

그들은 삼십대 후반이나 사십대 초반에 은퇴하기를 희망하지만 그게 어디 생각처럼 쉽나. 오십에만 은퇴해도 성공이다. 그런데 엄마는 젊은 날에 뼈 빠지게 고생한 보상으로 오십에 은퇴했다. 경제적으로 풍요롭다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하고 싶은 일은 다 하면서 살고 있으니 엄마가 바로 파이어족의 표본 아니겠는가 말이다.

내 이야기를 가만히 듣던 엄마가 빙글빙글 웃었다. 인생의 뒤안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한 당신이 별안간 트렌드의 선두 주자가 되었다는 사실에 은근히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었다. 언니는 한술 더 떠 “부럽다, 부러워. 나는 내일도 출근해야 하는데. 오십에 은퇴하긴 글렀어” 하며 엄마를 추어올렸다.

우리의 칭찬 세례에 신이 난 엄마가 큼큼 목청을 가다듬더니만 문화센터에서 배운 영어로 난데없는 자기소개를 했다. “렛 미 인트로듀스 마이셀프. 아이 엠 어 화이어족!” 그런 엄마의 모습에 눈물을 찔끔 흘리며 낄낄 웃었다. 엉망진창 콩글리시가 웃겨서 흘린 눈물인지, 엄마에게 고맙고 또 미안해서 흘린 눈물인지는 나만 알고 있으련다.

이주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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