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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시각] ‘직구’ 정책의 종말

이성규 산업1부장


야구하면서 직구(直球)는 던져봤지만 직구(直購)는 평생 해본 적 없는 문외한이다. 지난주 해외 직구 관세 전문가인 고1 딸아이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빠, 정부가 직구를 전면 금지한다는데 우리가 민원 넣고 항의하고 하면 바뀔 수 있지 않을까? 왜 정부는 국민이 싫어하는 일만 열심히 하는 거야?”

딸의 사정을 들어보니 친구 몇몇을 대표해서 해외 직구로 피규어 완구를 예약 주문해 놨는데 취소 시한도 지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20년 넘는 기자 경력 중 정부 정책을 절반 이상 취재한 자칭 정책전문기자는 우문현답이랍시고 이렇게 말했다.

“나랏일이란 게 그렇게 하루아침에 바뀔 순 없지. 국민의 건강권을 위한 거라는데 너희들 바람대로 되진 않을 거야.”

그렇게 아빠는 세상 물정 모르는 ‘개저씨’가 됐다. 직구가 국민 일상에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지, “그렇게 국민 건강이 걱정되면 일본 후쿠시마 오염수 유입이나 금지하라”는 여론이 비등한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직구를 하는 MZ세대들은 왜 기성세대가 주로 사는 골프채, 낚싯대 등은 직구 금지 품목에서 쏙 빼놓은 건지 따져 묻기도 한다.

정부는 KC 안전인증을 받지 않은 직구 제품을 전면 금지한다는 방침을 밝혔다가 거센 여론에 밀려 사흘 만에 철회했다. 용산 대통령실까지 나서서 사과와 함께 “대통령은 몰랐다”고 발뺌할 만큼 총선 패배 이후 대형 정책 리스크가 됐다.

좋은 취지(?)로 시작한 직구 금지 정책이 이렇듯 처참히 실패한 것은 정책 입안자들이 시대 변화의 흐름을 제대로 감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번 사태는 한국 사회의 관행적인 공급자 위주 경제정책이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음을 보여줬다. 정부는 국민 건강권을 1순위로 내걸었지만 속내는 알리·테무 등 중국 유통업체로 인해 국내 생산라인이 붕괴되는 것을 막고 싶었을 것이다. 직구로 더욱 저렴하게 제품을 사고 싶은 소비자보다는 당장 재고가 쌓여 문을 닫아야 하는 완구공장 사장이 눈에 밟혔던 셈이다. 지난 수십년간 수출 위주 육성책에 치여 소비자 권리는 뒷전이던 상황에서 소비자들은 경제 성장을 위해 내수를 떠받치는 부속품 취급은 더 이상 받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사 표현을 했고 이를 관철시켰다. 이번 해외 직구 정책 철회는 우리도 미국 등 선진국처럼 소비자 주권이 그 무엇보다 우선시되는 사회로 바뀌었다는 이정표가 됐다.

앞으로는 정책을 입안하고 시행하는 과정에서 속도보다 완성도가 우선돼야 한다는 교훈도 남겼다. 문제를 빨리 해결하는 속도감보다는 돌다리 두들기듯 여론 수렴 등 충분한 검토 후 정책을 내놔야 역풍을 피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윤석열정부는 만 5세 초등학교 입학, 연구·개발(R&D) 예산 삭감 등 제대로 된 여론 수렴 없이 속도전을 펼쳤다가 실패한 전례를 이번에도 되풀이했다. 직구 금지 철회를 발표하면서 당황하는 공무원의 모습은 전성기 시절의 구속만 믿고 무모하게 한가운데 직구로 정면승부를 했다가 역전 만루홈런을 맞아 망연자실한 투수처럼 보였다. 김영삼정부 시절 하루아침에 금융실명제를 시행하는 전광석화 같은 정책 성공사례는 구시대의 유물이 됐다.

이번 사태를 야기한 고위공무원을 포함해 기성세대는 그동안 속도에 치여 살아왔다. 경제 성장이란 단 하나의 목표를 위해 “빨리빨리”를 외치며 뛰었다. 덕분에 세계 7위 경제대국으로 올라섰지만 이제는 그 미친 속도 때문에 놓친 게 없는지 뒤돌아볼 때가 온 것 같다. “우리가 세상을 바꿨다”고 말하는 듯한 딸의 의기양양한 표정을 보면서 든 생각이다.

이성규 산업1부장 zhibag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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