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어떻게 소수의 지배가 가능했나

[책과 길]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
스티븐 레비츠키·대니얼 지블랫 지음, 박세연 옮김
어크로스, 440쪽, 2만2000원

지난 14일(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성추문 입막음 사건 관련 재판을 받고 있는 뉴욕시 맨해튼법원 바깥에서 취재진이 대기하는 가운데 트럼프 지지 깃발이 펄럭이고 있다. AFP연합뉴스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한 필독서로 자리잡은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를 쓴 하버드대의 두 정치학자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의 새 책이 번역돼 나왔다. 현대 민주주의의 취약성을 연구해온 두 저자는 전작에서 법을 무기로 활용해 정적을 말살하고 민주주의 정신을 훼손하는 ‘헌법적 강경 태도’를 21세기적 독재라고 비판했다. 신작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에서는 다수의 횡포를 견제하고 소수 의견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법적, 제도적 장치들을 활용한 ‘소수의 독재’를 민주주의의 새로운 적으로 지목한다.

‘다수의 지배’는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대원칙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다수의 뜻에 반하는 소수의 지배가 종종 벌어진다. 예컨대, 미국인 다수가 총기 규제에 찬성하지만 이를 법제화하지 못하고 있다. 미국 대법원은 지난 2022년 낙태권 폐기 결정을 내렸는데, 여기에 동의한 미국인은 37%에 불과했다.

선거에서는 다수 표를 얻고도 패배하기도 한다. “1992∼2020년 동안 치러진 모든 대선에서 공화당은 2004년을 제외하고 보통선거에서 패했다. 다시 말해 3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공화당이 더 많이 득표한 것은 ‘단 한 번’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공화당 대선 후보들은 그동안 ‘세 번’이나 대통령이 되었다.”

저자들은 “정치적 다수가 권력을 차지하지 못하고, 또한 선거에서 이기고도 통치하지 못한다”면서 “오늘날 미국 사회가 직면한 급박한 위협은 소수의 지배”라고 주장한다.

트럼프 현상은 소수의 지배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트럼프가 미국인 다수를 대변했던 적은 없다. 그럼에도 그는 선거인단 제도 덕분에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트럼프가 패배한 후 공화당이 그를 내쫓지 않고 오히려 떠받드는 이유도 소수의 지배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트럼프의 극단주의는 2020년 대선과 2018·2022년 중간선거에서 세 번 연속 패배했다. 하지만 공화당은 궤도를 수정하지 않았다. 시골 지역 몇몇 주를 장악하면 전국적으로 이기지 않고도 대통령 선거인단과 상원의석에서 얼마든지 다수를 차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들은 선거인단 제도에 의한 대통령 간접 선출, 불평등하고 지나치게 강력한 상원 제도, 최다득표자 선출제(소선거구제), 대법원 판사 종신제, 지독하게 어려운 헌법 수정 요건 등이 미국에서 소수의 지배를 떠받치는 기둥들이라고 지적한다. 이 제도들은 민주주의 시대 이전에 만들어진 헌법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극단적 갈등을 막고 다수의 횡포를 견제하고 정치적 소수를 보호하기 위해 고안됐다. 책은 이 제도들이 현대에 이르러 어떻게 다수의 지배를 훼손하는지 생생하게 서술한다.


전 세계 모든 대통령 민주주의 국가들이 간접선거를 폐지했지만 미국의 선거인단 제도는 그대로 남았다. 한 표라도 이기면 선거구의 선거인단 전체를 확보하는 선거인단 제도는 전체 득표에서 져도 대선에서 이길 수 있게 한다. 모든 주에 똑같은 상원의원 숫자를 배정한 상원 제도는 미국 인구의 20% 미만을 차지하는 인구수가 낮은 주들만으로도 상원 과반을 차지할 수 있게 한다. 국민이 뽑지 않고 대통령이 임명하는 대법관들은 종신토록 재직하면서 여론이나 의회의 결정에 상관없이 법안을 없애버린다.

최다득표자 선출제는 전국적인 득표율과 의회 의석수의 불일치를 초래한다. 이 제도를 고수하는 한국에서도 지난 22대 총선에서 민주당과 국민의힘의 지역구 득표율은 각각 51%와 45%였지만 의석수는 161석과 91석으로 크게 벌어졌다. 한 선거구에서 여러 명의 의원을 선출하는 중선거구제와 비례대표제는 득표율과 의석을 좀더 일치시킨다.

미국은 민주주의의 개척자이고 모범이었다. 많은 나라들이 미국의 헌법과 제도를 모방했다. 하지만 다른 민주주의 국가들이 상원의 힘을 빼고, 비례대표제를 도입하고, 대법관 종신제를 폐지하고, 헌법을 수정하면서 다수의 지배를 강화하는 쪽으로 나아가는 동안 미국은 이 제도들을 개혁하지 못하고 다수의 지배와 멀어졌다.

다수의 의지가 좌절되는 상황이라면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나 효능감이 약화될 수밖에 없다. 소수의 지배가 가능하다면 다수를 위한 정치를 하지 않아도 된다. 특히 소수의 지배는 다수의 이익을 침해할 수 있다. 저자들은 “미국 민주주의가 근로 계층과 중산층 유권자들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했던 한 가지 이유로 반다수결주의 제도를 꼽을 수 있다”면서 최저임금을 예로 든다. 미국인들은 수십 년 동안 최저임금 인상을 강력하게 지지했다. 2019년에는 최저임금을 시간당 15달러로 끌어올리기 위한 임금인상법이 하원을 통과했고, 국민 81%가 지지했다. 그럼에도 상원은 그 법안의 채택을 거부했다.

책은 정치적 소수를 보호한다는 명분을 가진 반다수결주의적 제도들에 숨겨진 소수의 독재라는 새로운 위험성을 제기한다. “민주주의는 몇몇 핵심적인 반다수결주의 제도 없이는 살아남지 못한다. 그러나 동시에 반다수결주의 제도가 지나치게 만연한 상황에서도 살아남지 못한다.”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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