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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열며] 흑인 줄리엣, 백인 춘향이

장지영 문화체육부 선임기자


다음 달 영국 런던에서 개막하는 셰익스피어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이 캐스팅 공개 이후 화제를 모으고 있다. 영화 ‘스파이더맨’의 스타 배우 톰 홀랜드가 로미오 역으로 출연하는 것과 함께 줄리엣 역에 흑인 여배우 프란체스카 아메우다-리버스를 캐스팅한 것에 대해 논란이 일었다. 아메우다-리버스는 영국 국립청소년극단 출신으로 옥스퍼드대학에서 음악을 전공했다. 현재는 배우 겸 뮤지션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런데 캐스팅 공개 이후 SNS에 “흑인이 줄리엣을 연기하는 건 말도 안 된다” “더 예쁜 흑인 배우를 찾아라” 등의 발언이 쏟아졌다. 인신공격성 비난이 확산하자 제작사는 공식 SNS의 댓글 기능을 차단하고 인종차별을 규탄하는 성명서를 게재했다. 이어 배우 800여명도 아메우다-리버스 지지 성명서를 발표했다.

흑인 배우 캐스팅을 둘러싼 논란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해 개봉한 디즈니의 ‘인어공주’는 흑인 가수 할리 베일리의 출연으로 2019년 캐스팅 단계부터 시끄러웠다. 그리고 개봉 이후 디즈니의 PC(정치적 올바름)주의에 따른 ‘블랙 워싱’(원래 백인이었던 캐릭터를 흑인으로 바꾸는 것)이라는 의견과 이런 시선 자체가 인종차별이라는 의견이 대립했다. 한국에서는 인어공주가 흑인이라서가 아니라 못생겼기 때문에 문제라는 외모 논란이 더해졌다.

다만 구미 공연계에선 20세기 후반부터 이미 인종을 구분하지 않고 배우를 캐스팅하는 ‘컬러 블라인드 캐스팅’이 확산돼 왔다. 한국 성악가들이 구미에서 서양 종합예술의 최고봉이라는 오페라의 주역을 맡는 것도 그 예이다.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만 하더라도 영국 런던에서 1988년 흑인 배우가 로미오 역을 맡은 바 있고, 2013년 미국 뉴욕에서는 흑인 여배우가 줄리엣 역으로 출연하는 등 다양한 인종의 출연 사례가 있다. 그리고 2019년 ‘로미오와 줄리엣’을 재해석한 뮤지컬 ‘& 줄리엣’에서도 흑인 여배우가 줄리엣을 연기했다. 5월 내한하는 영국 안무가 매슈 본의 무용극 ‘로미오와 줄리엣’에도 흑인 무용수가 줄리엣으로 출연한다.

컬러 블라인드 캐스팅과 이를 둘러싼 논란은 영국과 미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외국인 인구 비중이 5%를 넘으면 다인종·다민족 국가로 분류하는데 올해 한국이 유럽과 북미 외에 처음으로 다인종·다민족 국가가 됐다. 그리고 한국에서도 다양한 인종과 국적의 배우가 무대에 서고 있다. 그동안 극 중 한국인과 구별되는 외국인 역이었지만 최근엔 한국인 배우와 마찬가지로 인종이나 국적과 상관없는 역할을 맡기 시작했다. 얼마 전 막을 내린 뮤지컬 ‘레미제라블’ 한국어 프로덕션에는 인도-일본계 배우 루미나가 주역급인 에포닌 역으로 출연했으며 연극 ‘출입국사무소의 오이디푸스’에는 튀르키예 출신 배우 베튤이 한국 배우들과 함께 다양한 역할을 소화했다.

지난 1월 공연된 연극 ‘안나전: Hallo 춘향’은 독일인 배우 윤안나가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 출연한 인도 출신 배우 아누팜 트리파티 등 외국인 배우들과 함께 선보인 작품이다. ‘외국인이 춘향전을 연기한다면’이라는 부제를 단 이 작품은 한국에서 다양한 역할을 연기하고 싶은 외국인 배우들의 희망과 함께 예술인으로 살아가기 어려운 현실을 그렸다. 한국에서도 이제 증가하는 외국인 배우들의 역할과 처우에 대해 고민해야 할 시기가 온 것이다. 머지않은 시기에 백인 여배우가 실제로 춘향이를 연기할 수 있는 만큼 우리도 열린 자세를 가져야 하지 않을까.

장지영 문화체육부 선임기자 jyja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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