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 전체기사

[혜윰노트] 벚꽃과 봄놀이와 최남선

허영란 (울산대 교수·역사문화학과)

입력 : 2024-04-19 00:35/수정 : 2024-04-19 00:35

이 봄에도 막막해 고통받는
이웃이 있다… 햇살에 가린
아픈 그림자 잊지 말았으면

설을 쇠고 나면 추위가 채 꺾이기 전부터 마음이 바빠진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아도 바짝 마른 겨울 숲에서 생명의 기운을 길어 올린 꽃망울들이 언제 터져 나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해마다 찾아오는 봄이지만 빠르거니 늦거니 시점이 일정하지가 않다. 앙상한 가지들 사이에 묻혀 있어서 알아채기 어렵지만 초록 잎 하나 없는 갈색 줄기에서 문득 진달래 꽃망울이 터지기 시작하면, 봄이다. 순식간에 연분홍이 지천이다. 근래에는 진달래, 목련, 개나리가 앞다투어 한꺼번에 개화한다. 그리고 곧 벚꽃 세상이다. 이제 봄이 왔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아채고 함께 행복해진다.

그런데 뜨거웠던 총선 열기와는 대조적으로 올해 봄에는 ‘벚꽃 없는 벚꽃축제’가 화제였다. 일조량 부족과 꽃샘추위 때문에 벚꽃 개화 시기가 예상보다 늦어진 탓에 애써 준비한 벚꽃축제 행사장에서 벚꽃을 볼 수 없는 것이 문제였다. 한 지자체는 심지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죽을죄를 졌습니다. 하늘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라며 축제 기간 연장을 핑계로 삼아 벚꽃축제를 홍보하는 기지를 발휘하기도 했다.

그런데 객관적으로는 봄꽃의 개화 시기가 전반적으로 빨라지고 있다고 한다. 서울에서 벚나무 개화를 관측하기 시작한 1922년 이래 2013년까지는 3월에 개화한 적이 없었다. 2014년에 역대 처음으로 3월 28일에 개화했고 올해의 공식 개화일인 4월 1일도 다섯 번째로 이른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개화 시기가 앞당겨지는 중요한 이유는 지구온난화이다. 기후 위기가 ‘자연’의 모습을 하고 턱밑까지 쫓아와 있는 것이다. 봄꽃들이 때 없이 피어나게 만든 당사자는 하늘이 아니라 다름 아닌 인간이었다.

백 년 전의 봄맞이 정경을 알아볼 겸 일간지를 살펴보니 역시나 벚꽃은 4월 하순에 만개했다. 1921년 4월 24일 자 신문에 서울 남산과 조선총독부 총독관저 뒤편에서 ‘비단 장막 드리운 듯’ 만개한 벚꽃 사진과 함께 일요일을 맞아 다홍치마 차려입고 봄놀이 나온 사람들의 들뜬 모습이 소개되어 있다. 당시 서울에서는 남산 일대와 우이동 같은 곳이 대표적인 벚꽃놀이 장소였다. 일제 당국은 1922년에 창경궁을 개조해 유원지로 만든 창경원에 벚나무를 심어 벚꽃놀이 명소로 만들었다.

그런데 화려한 벚꽃 사진 바로 아래 있는 엉뚱한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4월 23일 오전에 미국 시카고대학 교수이자 인류학 박사인 ‘스타’씨가 공덕리 감옥에서 복역하고 있는 최남선을 면회했다는 기사였다. ‘봄철을 맞은 세상에는 벌써 새로 지은 겹옷을 입고 꽃구경에 분주’하지만, ‘옥 창 안에는 아직도 겨울 솜옷과 맨발’의 독립운동가가 갇혀 있었다. 그는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일로 징역 2년반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었다. 이런 기사 배치가 의도된 것인지, 아니면 삶이란 원래 빛과 그림자가 뒤섞여 있는 법이라 우연히 그리된 것인지 알 길은 없다. 봄나들이가 아무리 좋아도 만세사건 관련자들이 아직도 차디찬 감옥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뜻이 담겨 있는 것도 같다.

이제는 벚꽃 명소를 따로 손꼽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어디서나 만개한 벚꽃 그늘에서 봄을 만끽할 수 있다. 계절이 주는 행복한 재미를 쉽게 즐길 수 있게 되었으니 좋은 일이다. 하지만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벚꽃 개화 시기는 한 달 가까이 앞당겨졌고 그런 변화를 불러온 이상기후는 지구촌 어딘가에서 구체적으로 사람들의 생존을 위협한다.

이제 수감된 맨발의 독립운동가는 없지만 이 봄에도 우리 이웃은 어린 자식을 잃은 아픔, 힘겹게 생계를 도모해야 하는 막막함에 갇혀 고통받고 있다. 벚꽃 지면 철쭉과 장미가 온다. 그렇게 봄의 향연은 계속되겠지만 그것이 세상 전부는 아니다. 우리도 봄 햇살에 가려진 그림자를 잊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허영란 (울산대 교수·역사문화학과)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수집,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국민일보 신문구독
X 페이스북 카카오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