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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열며] 한국詩라는 경이

김남중 문화체육부 선임기자


요즘 시대에 누가 시를 읽느냐고 하겠지만 한국은 1년에 수십만 권의 시집이 출판되는 나라다. 문학과지성사는 새 시집, 선집, 기존 시집 중쇄와 리뉴얼 등을 합해 한 해 평균 20만∼22만부의 시집을 출간하고 있다고 밝혔다. 창비에서 출판하는 시집도 매년 15만∼18만부에 달한다. 한국은 시집 시리즈가 500번, 600번으로 이어지는 나라이기도 하다. ‘창비시선’은 최근 500번째 시집을 찍었고, ‘문지시인선’은 600번에 도달했다. 후발 주자인 ‘문학동네시인선’도 200번을 넘었다.

한국문학번역원장을 지낸 김사인 시인은 “시집이 대중의 호응을 얻으면서 500번, 600번으로 이어지는 건 한국이 거의 유일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했다. 그는 “외국에서는 한국의 시집 출판량에 대해 황홀하게 생각한다. 어떤 시집은 16쇄, 20쇄 찍는다고 하면 기절하려고 한다”고 덧붙였다. 문학과지성사 대표인 이광호 문학평론가도 “해외 어느 서점에 가도 시집 코너를 보기 어려운데 한국에는 시집 코너가 있다”면서 “시 독자가 이 정도 굳건하게 남아 있는 경우는 세계적으로 찾아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시집의 상업적 출판은 1974년에 시작됐다. 민음사가 ‘오늘의 시인’ 시리즈를 통해 고은, 천상병, 김종삼, 정현종, 강은교 등의 시집을 꾸려내면서 시집 대중 출판 시대를 열었다. 이듬해 창비가 신경림의 ‘농무’를 시작으로 창비시선을 출발시켰고, 78년에 문지시인선이 이 대열에 가세했다.

김사인에 따르면 민음사의 김우창, 창비의 백낙청, 문지의 김현·김치수 등 4·19세대 문학평론가들이 50년 전 시집 출판을 시작하기 전까지 한국에서 시집을 내서 인세를 받는다거나 시집을 상업적 판매의 대상으로 삼는 문화가 없었다. 백석의 ‘사슴’이나 서정주의 ‘화사집’ 같은 이전의 시집들은 대개 100부 한정판으로 제작됐고 자비로 출간됐다.

김사인은 “100권쯤 만들어 출판사와 시인이 아는 동료들과 나누어 갖는 것이 시집이었다”면서 “시인 노릇 하던 사람이 100명, 200명이 안 되던 시절이었다”고 회고했다.

지금 한국의 시인 수는 3만∼4만명에 달한다. 70대인 정호승 시인과 2000년생인 한재범 시인이 나란히 시집을 발표한다. 문학 담당 기자들에게는 한 주도 빠짐없이 새 시집들이 배달된다. 새 시집이 1만부 이상 팔리는 사례도 여전히 드물지 않다. 요즘 한국시는 세계의 독자들과 함께 읽는다. 문지시인선 600권 중 86권이 해외에 번역됐다.

세계적으로 보면 한국어로 쓰인 변방의 문학, 문학으로서는 비주류 장르인 시, 그 좁은 입지 위에서 한국시가 이토록 생생하게 살아 있다는 건 경이로운 일이다. 출판과 독서에 대해서는 비관론이 무성하지만 시집 출판이 계속되고 있다는 건 한국에 좋은 독자들이 존재한다는 분명한 증거일 수 있다.

지금 한국시를 읽고 쓰는 이들이 주로 젊은이들이라는 점도 놀랍다. 젊은 독자들이 계속 유입되고, 젊은 시인들이 쉼 없이 등장하고 있다. 이광호 대표는 “젊은이들에게 시가 올드한 게 아니라 새롭고 힙한 장르처럼 여겨지고 있다”면서 “시는 짧고 감각적이면서 동시대 감각을 충격한다. 이런 언어의 즐거움을 즐기는 세대가 생겨난 게 아닌가 싶다”고 분석했다. 창비 부주간인 백지연 문학평론가는 “시를 쓰려는 젊은이들이 굉장히 많다”면서 시와 영상의 연결성에 주목한다. “영상과 시는 잘 어울린다. 영상에 시를 붙일 수도 있다. 그래서 영상 시대에도 시는 가능성이 있는 장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김남중 문화체육부 선임기자 nj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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