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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돋을새김] 민심은 경제를 심판했다

김찬희 편집국 부국장


꽤 다급한 상황이었다. 절치부심하다 적의 수도인 팽성을 점령하며 반격에 성공했지만, 고작 3만명 군사에 역습을 당해 56만명에 이르는 대군이 괴멸 수준에 이르렀다. 유방(劉邦)은 가족까지 버리고 도주할 정도였다. 한나라 군대는 후방 지원으로 겨우 급한 불을 끄고, 요지인 형양(滎陽)·성고(成皐) 지역에서 초나라 군대와 대치한다. 하지만 항우(項羽)의 기세는 뜨거웠다. 한나라 군대는 형양과 성고를 빼앗기고, 최후 저지선이라 할 수 있는 공(鞏)과 낙양(洛陽)으로 후퇴할 지경에 이른다. 여기마저 뚫리면 본거지 관중까지는 무인지경이다. 이때 참모인 역이기(酈食其)가 후퇴에 반대하며 이런 말을 남긴다. “왕자 이민인위천 이민인 이식위천(王者 以民人爲天 而民人 以食爲天, 왕은 백성을 하늘로 삼고 백성은 먹을 것을 하늘로 여긴다).” 간언을 받아들인 유방은 초나라 군대가 소홀하게 방어하던 대규모 식량창고 오창(敖倉)을 탈취해 ‘먹고사는 일’부터 해결하고, 형양·성고를 되찾는다. 기원전 204년, 무게추가 유방에게 기울기 시작한 결정적 순간을 네 글자로 요약하면 ‘이식위천’이다.

이식위천은 다른 시간, 다른 공간에서도 모습을 드러냈다. 임진왜란이 끝났을 때 조선의 경제는 처절하게 무너졌다. 인구는 900만명에서 200만명으로, 경작지는 1700만결에서 30만결로 추락했다. 전쟁 전과 비교해 세입은 2~3% 수준까지 떨어졌다. 언제 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지경에 처한 조선을 살린 건 대동법이었다. 공납 대신 쌀을 걷고 세 부담을 종전보다 5분의 1로 줄인 덕에 재정은 늘고, 민생이 숨을 돌렸다. 대동법을 세우고 밀고 나간 이들은 이식위천, 네 글자를 신념으로 삼았다. 민생을 책임지지 않는 국가는 나라라고 할 수 없다고 믿었다.

먹고사는 일의 중요함은 2024년 대한민국에서도 마찬가지다. 4·10 총선에서 여당이 참패한 원인 가운데 하나는 경제다. 아니, 경제가 전부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유권자는 거창한 ‘정권 심판론’이 아니라 팍팍한 살림살이에 흔들렸다. 그만큼 한국 경제는 여러 위기에 둘러싸여 있다. 치솟는 물가는 진정 기미를 보이지 않고, 고금리·고환율은 가계와 기업을 옥죄는 중이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 이란이 가세하며 중동 전체에 불을 지피고 있다. 전기 요금을 포함해 공공요금 인상이 대기 중이고,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부실은 건설사 연쇄 부도는 물론 금융위기 경보음을 높인다. 또한 한국 경제는 ‘부채 팬데믹’이라는 위험 앞에 서 있다. 가계부채, 기업부채엔 이미 경고등이 켜졌고 국가채무도 심상찮다. 지난해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채무를 합한 나랏빚은 역대 최대인 1126조7000억원에 이르렀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은 50.4%로 1982년 관련 통계 작성 이후 처음으로 절반을 넘어섰다. 여기에다 저성장, 저출산은 먹구름을 드리우는 중이다.

나쁜 경제 상황이 여당이나 야당, 정부, 어느 한쪽의 일방적 잘못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대응 과정에서 보여준 정부와 정치권의 모습에서 진정으로 민생을 걱정하는 마음을 찾아보기 어렵다. 사전투표일이 하루 지난 날 장인·장모 추도예배 자리에서 자영업자인 큰처남댁은 이런 말을 건넸다. “경기가 안 좋아도 이렇게 안 좋은 적이 없어요. 코로나19 때도 이러지 않았는데. 그냥 뭐라도 변해야 하지 않나 생각했을 뿐이에요.”

이번 선거에서 유권자들이 보여준 민심은 정권 심판이 아니다. 의회 권력을 쥔 범야권이든, ‘국민의 뜻을 겸허히 받아 국정 쇄신을 하겠다’는 여당과 정부든 차분하게 주위를 둘러보라. 치열한 선거 열풍이 지나가고 이제 ‘경제의 시간’이 왔다.

김찬희 편집국 부국장 ch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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