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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사니] ‘혹시 트럼프’

김철오 국제부 기자


일본·영국 등 미 맹방들도
트럼프에 눈도장찍기 분주
혹시 넘어 '진짜 트럼프'까지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의 국빈 방미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상·하원 합동 연설 못지않게 주목받은 것은 노스캐롤라이나주 방문이다. 기시다는 지난 12일(현지시간) 노스캐롤라이나에 있는 도요타의 전기차 배터리 공장, 혼다의 상업용 제트기 공장을 연달아 찾아 시설을 둘러보고 기업인들을 만났다. 로이 쿠퍼 노스캐롤라이나 주지사와의 오찬에서는 도요타·혼다 공장을 “미·일 간 협력의 상징”이라며 각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도요타는 2021년부터 노스캐롤라이나에 139억 달러(약 19조3000억원)를 들여 전기차 배터리 공장을 건설하고 있다. 내년부터 가동 예정인 이 공장은 5000여개 일자리를 창출하게 된다. 기시다는 “일본 기업이 미국 경제에 얼마나 공헌하고 있는지 알리고 싶다”고도 했다. 미국 언론들은 기시다의 이 발언을 일본제철의 US스틸 인수 과정에서 높아진 반발 여론을 잠재우려는 시도로 봤다.

하지만 일본 언론들의 관점은 조금 달랐다. 일본제철에 대한 미국인들의 적개심을 걷어내기 위한 발언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었지만 일부 언론은 이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재집권 가능성에 대비하는 ‘포석’으로 봤다.

노스캐롤라이나는 전통적인 공화당 우세 지역이지만 2000년대 들어 민주당과 박빙의 승부가 펼쳐진 경합주다. 트럼프는 2016년부터 두 번의 대선마다 노스캐롤라이나에서 모두 승리했지만 2020년에는 49.93%의 지지를 얻어 바이든(48.59%)을 가까스로 따돌렸다. 기시다에게 이런 노스캐롤라이나는 트럼프에게 우호적 메시지도 보내면서 바이든과 밀착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방문지로 적합했다.

일본 지지통신은 기시다의 노스캐롤라이나 방문에 대해 “‘모시토라’(혹시 트럼프)를 염두에 두고 일본 기업의 역할을 설명하려 했다”고 평가했다. 모시토라는 ‘혹시’라는 뜻의 ‘모시’와 트럼프의 이름을 줄인 ‘토라’를 합성한 신조어다. 이 말에는 이미 2016년부터 4년간 여러 국제협약을 파기하고 미군 주둔 비용을 추가로 요구한 트럼프 집권기의 악몽을 되돌리지 않길 원하는 일본의 불안감이 녹아들어 있다.

일본은 이미 지난해 4월 주미 일본대사관을 통해 미국 로비 기업 발라드파트너스와 계약하고 월 2만5000달러의 수임료를 지불하고 있다. 이 기업 대표는 트럼프의 30년 지기인 브라이언 발라드다. 워싱턴포스트는 모시토라라는 표현을 미국에 소개하면서 “일본 지도자와 관료들은 트럼프 집권 2기 행정부가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걱정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더욱이 일본은 올해에야 장기 불황을 만회하고 활황을 타기 시작했는데 트럼프식 불확실성은 더 심각하게 다가오는 악재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트럼프가 지난 1월 시작된 미 공화당 경선에서 승승장구하자 일본에서는 ‘거의 당선권에 근접했다’는 뜻인 ‘호보토라’(거의 트럼프), ‘진짜 미국 대통령이 될 수도 있다’는 의미를 담은 ‘마지토라’(진짜 트럼프)라는 말까지 등장했다. 그중 가장 먼저 사용된 ‘모시토라’는 일본 유력 언론과 증권가 보고서에도 등장하는 표현이 됐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나라는 일본만이 아니다. 워싱턴에 주재한 유럽 국가 외교관들은 최근 대사관, 싱크탱크, 호텔에서 트럼프의 속내를 파악하고 줄을 대기 위해 그의 재임 시절 인사들을 만나 보고서를 작성하고 본국으로 타전하고 있다. 워싱턴 외교가에서 떠도는 트럼프 측 인사 명단을 입수한 CNN의 지난 11일 보도를 보면 마이크 폼페이오 전 국무장관처럼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도 등장한다.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외무장관은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과의 회담을 하루 앞둔 지난 8일 트럼프를 먼저 찾아갔다. 바이든을 의식한 듯 “야당 대선 후보를 만나는 것은 관행”이라고 둘러댔다. 미국의 맹방도 진땀을 뺄 만큼 워싱턴 외교가 상황이 녹록지 않은 모양이다.

김철오 국제부 기자 kcopd@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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