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 칼럼 > 내일을열며

[내일을 열며] 정당 정치와 그 파괴자들

강주화 산업2부장


선거가 끝났다. 올해는 유권자로서 어느 때보다 많이 회의했다. 민주주의는 발전하는가. 투표장에서 비례대표 후보자를 낸 정당 38개 이름이 적힌 51.7㎝ 투표용지를 실물로 보았을 땐 참담했다. 한국 정당정치가 퇴보하고 있다는 생각에서다. 다양한 민의를 입법에 반영하기 위해 나온 준연동형 비례대표 제도가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의 무능과 무책임 속에 난파한 것처럼 보였다. 이 제도는 정당지지율에 비례해 국회 의석을 할당하되 지역구 의석이 더 적은 정당에 상대적으로 더 많은 의석이 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투표용지 최상단에 거대 양당의 위성정당 더불어민주연합과 국민의미래가 3번과 4번에 자리했다. 1, 2번은 없었다. 기존 정당으로 나가면 의석 수가 줄어들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꼼수를 쓴 것이다. 양당에서 밀려난 이들이 만든 당은 6번 새로운미래와 7번 개혁신당이다. 두 당은 민주당과 국민의힘이 최소한의 비판과 경쟁도 허용하지 않는 곳이란 것을 웅변했다. 8번 자유통일당과 9번 조국혁신당은 국민의힘 출신인 윤석열 대통령을 지지하기 위해 그리고 반대하기 위해 각각 만들어졌다. 특히 9번은 전형적인 비토크라시(vetocracy·맹목적으로 반대하는 정치) 결과였다. 이 당은 ‘검찰독재 종식’을 강령으로 앞세웠고 정책공약 1호로 ‘한동훈특검법’을 내놨다. 반대와 복수를 직설했다. 사회 통합의 중심이 돼야 할 정당이 오히려 분열의 기폭제가 됐다. 분열과 반목의 정치가 소용돌이치면서 소수 정당은 물론 유일한 원내 진출 진보 정당인 녹색정의당조차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처음 국회의원 선거에 참여했던 2000년 16대 총선이 떠오른다. 그때 대학생이던 나는 서울 한 지역구의 투표 참관인이었다. 창당한 지 얼마 안 된 민주노동당 소속이었다. 해당 지역구는 당시 이미 4선이던 조순형 의원이 출마한 곳이었다. 투표 종료 후 여당 참관인으로 종일 함께했던 중년 여성이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학생, 고생했어. 민노당도 머지않아 당선될 거야. 우리도 그게 미래란 걸 알아.” 그분이 불쑥 던진 ‘미래’라는 말에 설렜다. 민노당은 ‘일하는 사람들의 희망’이란 표어를 가진 진보 정당이었다. 이 정당이 원내에 진출한다면 정치가 더 발전할 거란 기대감이 들었다. 민노당은 그해 총선에서 단 1석도 얻지 못했다.

하지만 그분이 얘기했던 미래는 생각보다 빨리 왔다. 2004년 17대 총선에서 민노당은 지역구 2석과 비례대표 8석을 얻었다. 진보 정당의 첫 원내 진출이었다. 민노당은 제3당이 됐고 국회에서 캐스팅보트 역할을 했다. 18·19·20·21대를 거치면서 정의당으로 이름을 바꿨고 주요 법안 처리 과정에서 노동자, 장애인, 이주민 등 사회적 약자의 권리를 옹호했다. 정의당은 이번에 기후환경 위기에 대응하는 녹색당과 연대했다. 낮은 지지도는 녹색정의당이 국민 설득에 실패한 원인도 있지만 현재 정당의 구조적 한계도 매우 크다.

거대 양당의 틈바구니에서 다양한 국민 목소리를 담으려는 소수 정당이 이목을 끌기 쉽지 않다. 진보 정당은 존재감을 잃었고 비토 정당은 득세했다. 22대 총선은 퇴보한 정당 정치와 선거 제도의 위기를 그대로 반영했다.

미국 정치학자 애덤 셰보르스키는 투표를 ‘종이 돌(Paper Stones)’에 비유했다. 유권자가 선거로 정치 세력을 심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국민이 이번에 던진 종이 돌은 퇴보한 정당 정치의 슬픈 자화상이다. 가장 큰 책임은 거대 양당에 있다. 정치권은 이번에 차악이라는 이유로, 반대를 위한 반대로 표를 많이 받았다고 해서 승리의 미소를 짓지 않기 바란다. 선거는 계속 있다. 정치가 종이 돌을 맞을 시간은 또 온다.

강주화 산업2부장 rula@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수집,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국민일보 신문구독
X 페이스북 카카오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