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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샛강에서] 잊혔던 존 무어 선교사의 재발견

장창일 종교부 차장


1968년 11월 서독 집권당인 기민련 당대회 현장. 한 여성이 단상에 앉아 있던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거 총리에게 다가와 그의 뺨을 치며 “나치, 나치, 꺼져라”고 외쳤다. 기자였던 그의 이름은 베아테 클라르스펠트였다.

1966년 말 연방 총리에 지명된 키징거는 과거 나치 당원으로 활동한 전력이 있었다. 나치 패망 후 23년이나 지났지만 나치 부역자 문제가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는 단면이다. 나치 13년 동안 ‘히틀러 유겐트’라는 이름으로 아이들까지 세뇌했을 정도로 전 국민을 장악했다. 법률가나 공무원, 문학·예술가, 사업가들도 살기 위해 부역을 택했다. 나치 부역자들은 전후 복구라는 핑계로 대다수가 살아남아 라인강의 기적을 써 내려갔다.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을 통해 처벌이 완료됐을 것만 같았던 독일도 긴 시간 나치 그림자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우리가 기억하는 ‘새로운 독일’의 모습은 역설적이게도 ‘따귀 사건’으로부터 조금씩 자리 잡아갔다.

빌리 브란트 총리가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의 유대인 위령탑 앞에서 돌연 무릎을 꿇었던 게 1970년 12월 7일이었다. 그는 한겨울 콘크리트 위에 무릎 꿇은 채 오랫동안 고개 숙이고 묵념했다. 그의 사죄는 전범국 독일의 이미지를 일순간 바꿔놓았다. 세계 언론은 “무릎을 꿇은 것은 한 사람이었지만 일어선 것은 독일 전체였다”고 평했다.

또 다른 전범국인 일본도 패전 후 독일과 유사한 길을 걸었지만 결과는 달랐다. 국제극동 군사재판을 통해 전범들에 대한 재판이 진행됐지만 A급 전범을 모두 단죄하는 것조차 실패했다. 대표적으로 기사회생한 전범이 일본 왕이다. 살아남은 이들은 전후 복구에 매진했을 뿐 ‘빌리 브란트의 무릎’과 같은 세계인의 마음을 울린 사죄는 하지 않았다.

35년 동안 일제에 의해 식민 지배를 받았던 우리나라는 광복 79년이 지난 지금까지 과거사 청산 문제가 뜨거운 감자다. 반민족 행위자 처벌을 위해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 만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는 1년도 못 돼 해산하고 말았다. 독일과 일본의 전범재판이 미완이었을지언정 마침표를 찍었던 것과 사뭇 다르다. 사죄와 반성, 용서와 화해의 과정이 실종된 토대 위에 선 현실은 위태롭다. 상처받은 이들과 후손의 아픔도 여전하다. 갈등의 불씨는 언제든 큰불이 돼 번지기 마련이다.

존 무어(1874~1963) 선교사도 일제 강점기의 아픔을 고스란히 품었던 인물 중 한 명이다. 미국감리교 파송을 받은 무어 선교사는 평양을 중심으로 교육 선교를 하면서 160여개 교회와 30여개 학교를 설립했다. 그는 1894년 세워진 광성학교(현 광성중·고등학교)가 성장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 인물이지만 긴 세월 한국 교회사에서 잊혔다.

일제는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뒤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 국적 선교사를 모두 적으로 보고 추방했다. 무어 선교사도 이런 조치로 1941년 우리나라를 떠났다. 그의 손끝을 거친 학교와 교회 등이 무주공산이 되자 일본의 편에 섰던 몇몇 감리교 교권 인사들은 이 소유권을 빼앗았다. 무어 선교사가 돌아올 자리가 모두 사라진 셈이었다. 무도한 세력은 학교를 비롯한 재산을 강탈한 데 그치지 않고 무어 선교사의 공마저 역사에서 지웠다.

영원히 묻힐 것만 같았던 무어 선교사의 헌신이 광성중·고등학교 개교 130주년인 올해 들어 되살아나고 있다. 학교와 연구진은 그가 미국으로 보냈던 2625쪽 분량의 선교 보고서를 발굴해 분석하며 역사 바로 세우기에 나섰다. 왜곡된 과거를 제자리로 돌리는 일, 역사 앞에 선 이들이 늦더라도 감당해야 할 사명이 아닐까.

장창일 종교부 차장 jangc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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