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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초롱] 조정, 뭘 준비해야 할까

안지현 대전고법 상임조정위원장


최근 법원의 가장 큰 화두는 재판 지연 문제다. 다른 나라들의 통계와 비교하면 우리나라 재판 속도가 빠른 편이라지만 뭐든 빨리 해치우는 K문화가 어디 유독 법원에만 호락호락할 것인가. 이렇게 재판 지연이 쟁점이 될 때마다 늘 따라오는 해결책 중 하나가 ‘조정 활성화’다. 시간과 비용, 노력이 많이 드는 재판 대신 조정 절차를 통해 빨리 분쟁을 끝내자는 취지다. 하지만 조정이 진정한 재판 지연의 해결책이 되려면 이를 어떻게 운용하고 준비하는지가 더욱 중요하다.

민사소송 중인 철수씨의 예를 들어보자. 법원에서 집으로 등기우편이 날아왔다. 봉투를 열어보니 조정기일 통지서라고 쓰여 있다. ‘조정이 뭐지?’ 순간 떠오르는 건, 강에서 열심히 노를 젓는 조정 선수들 모습이다. 인터넷을 검색해보았다. 서로 타협하고 양보해서 분쟁을 해결하는 절차라고 한다. ‘재판을 걸었는데, 왜 조정을 하라는 거지? 혹시 돈 주기 싫어서 조정해 달라고 한 건가?’ 버럭 화가 나고 괘씸하다. 타협할 생각이었으면 비싼 변호사 비용을 들이지 않았을 거다. 일단 가서 뭐라고 하나 이야기나 들어봐야겠다.

이번에는 영자씨의 이야기다. 재판하러 법원에 다녀오는 게 보통 일이 아니다. 한 번에 끝나는 줄 알았는데, 한 달 뒤에 또 오라고 하면서 무슨 서류를 내라고 한다. 소장 쓰는데도 비용이 꽤 들었건만 계속 이렇게 돈을 써야 하나? 직장에 여러 번 휴가신청을 하는 것도 만만치 않다. 한숨을 쉬던 중 우연히 법원 엘리베이터 안에서 ‘민사조정’에 대한 홍보 영상을 보았다. ‘나도 신청해볼까?’ 빨리 원만하게 해결하고 싶으니 조정으로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조정기일이 잡혔다. 미리 플랜A와 플랜B를 마련했다. 빌려준 돈을 한 달 내로 받을 수 있다면 원금을 80% 정도까지 깎아주는 것이 플랜A다. 변호사 선임비가 얼마인지 알아보고, 그 범위 내에서 돈을 깎아주기로 한 것이다. 플랜B는 최대 1년에 걸쳐 나눠 받는 방법이다. 재판이 끝나는 예상 시점이 1년 정도임을 고려했다. 하지만 이렇게 하면 원금을 깎아주기는 어렵다. 내가 양보했는데 상대방이 얌체같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경우의 대비책도 생각해야 놓아야 한다. 부동산을 담보로 받거나, 불이행하면 위약금조로 돈을 더 받겠다고 요구할 계획이다.

이 사람들 중 누가 조정에서 협상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을까? 당연히 영자씨일 것이다. 철수씨는 조정에 나갔다가 상대방이 빌려준 돈을 깎아 달라고 하자 그만 화를 내며 조정실을 박차고 나와 버렸다. 반면 영자씨는 상대방과 조율 끝에 원금의 90%를 6개월에 걸쳐 나눠 받기로 했다. 조정을 그냥 소송 중 거쳐가는 단계라고만 생각할 것인가, 아니면 내 사건을 빨리 해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여길 것인가? 생각의 차이가 큰 결과의 차이를 낳게 될 것이다.

변호사들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나타난 증거와 쟁점을 토대로 승소 가능성을 미리 가늠해보고 재판을 계속하게 되면 드는 소송비용과 시간을 미리 계산해 본 뒤 조정에 참여하기 전에 미리 여러 개의 조정안을 준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특히 민사조정법은 조정 과정에서 한 말을 소송에서 원용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그런데 간혹 조정 과정에서 있었던 조정위원과 상대방의 말을 거론하며 재판에서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려는 시도가 있어 눈살이 찌푸려진다. 판단을 본질로 하는 재판과, 타협과 협상을 본질로 하는 조정의 차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일인 것 같다. 조정을 주도하는 법원도, 조정에 참여하는 사람들도 이런 조정제도의 특수성에 대한 이해가 선행돼야 ‘조정 활성화’ 정책이 진정한 빛을 발할 수 있을 것이다.

안지현 대전고법 상임조정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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