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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시론] 아카이로스? 유카이로스!

송용원(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조직신학)


한국 사회의 핵심적 면모를 파악하는 앵글로 철학자 한병철이 ‘피로’를 삼았다면 작가 정지우는 ‘분노’에 주목했다. 분노란 자기 신념과 현실이 일치하지 않을 때 무언가 잘못된다고 느끼면서 서서히 올라오는 감정이다. 모두의 바람이 현실과 어긋나기 시작하면 한 사회에 분노가 만연해지는 현상이 발생한다. 얼마 전 미국 에미상 8관왕에 오른 드라마 ‘성난 사람들(BEEF)’에서 남녀 주인공이 서로에게 날카로운 경적을 울려 대던 장면은 인생이 제대로 풀리지 않고 한참 꼬이던 두 인생이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서로의 얼굴을 날카롭게 한다”(27장 17절)는 잠언을 연상케 했다.

우리 사회에도 핵개인 시대와 초갈등 시대가 교차하면서 성난 목소리들이 곳곳에서 들려온다. 일본 작가 미우라 아야코는 빙점(氷點)이란 어는 점이 될 수도 있지만 녹는 점이 될 수도 있다고 고백한 바 있다. 어떻게 하면 어는 점 말고 녹는 점이 될 수 있을까. 나의 선택지가 줄어드는 한계점이 도리어 앞길을 새로이 보여주는 임계점이 될 수 있다는 신의 섭리를 깨우친다면 그리될 수 있지 않을까.

성경에 등장하는 성난 사람들의 대표주자로 단연코 훗날 바울로 개명한 사울이 압도적이다. 사도행전 9장에 보면 그는 등장부터가 자기 신념과 어긋나는 현실을 만드는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던 자”라고 소개될 정도였다.

바울의 분노지수는 그 후 어찌 됐을까. 그의 말년 서신에는 분노 자체가 아예 남지 않은 표정이다. 바울은 각종 한계상황에서 배어 나오는 감미로움을 맛보면서 이를 세상의 퇴짜가 아니라 하나님의 초대장으로 바라볼 줄 알게 된다.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빌립보서 4장 11~12절) 바울이 믿는 주님이 자기를 비우시고 제한하시는 케노시스(kenosis)의 하나님이셨기에 가능한 은총이다.

작가 애슐리 헤일스는 ‘양념이 너무 많으면 고르기 어렵듯이, 멋진 삶에 필요한 것도 더 많은 선택지가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한계로 다가오는 지침과 길잡이’라고 알려준다. 성경은 각자의 한계에서 각자의 독특한 길이 열리는 사례로 가득하다. 어찌 보면 생각지도 못한 제약이 있었기에 꼭 가야 할 길이 보이게 되고, 꼭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게 된다.

누가만 남아 있고 모두가 떠나 버린 극한상황이 닥쳤을 때 바울은 피로를 호소하지도 분노에 휩싸이지도 않았다. 누가와 날카롭게 부딪히는 일은 더더욱 없었다. 대신 그는 디모데에게 겨울이 오기 전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고 부탁한다. 바울은 이제 더는 ‘성난 사람들’이 아니다. 비결은 다음과 같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디모데후서 4장 2절) 전자는 유카이로스, 좋은 기회다. 후자는 아카이로스, 그다지 좋지 않은 기회다. 대개 유카이로스면 신이 나고 아카이로스면 화가 난다. 하지만 바울은 그럴 필요가 없다고 단언한다.

신실한 전도자가 빚어지는 기간은 전도하기 좋은 유카이로스 시절이 아니라 전도하기 참 어려운 아카이로스 시절이니 말이다. 푸르고 푸른 그리스도의 계절이 사실상 마련되는 시간도 예전 같은 한국교회의 호시절이 아니라 요즘 같은 어려운 시절일 수 있음을 잊지 말자. 어느 시대이건 어느 분야이건 아카이로스 없이 유카이로스는 오지 않는 법. 아카이로스 날들이 있으면 유카이로스 날들은 반드시 찾아오리니!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린도전서 13장 5, 7절)

송용원(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조직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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