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 칼럼 > 내일을열며

[내일을 열며] 마에스트라들이 몰려온다

장지영 문화체육부 선임기자


배우 이영애가 나오는 tvN 드라마 ‘마에스트라’는 한국 드라마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 지휘자를 주인공으로 삼았다. 제목인 마에스트라는 거장 지휘자를 뜻하는 이탈리아어 ‘마에스트로’의 여성형이다.

프랑스 드라마 ‘필하모니아’를 각색한 이 작품은 엄밀히 말하면 클래식 음악이라는 외피 안에 치정과 미스터리를 담았다. 드라마가 진행될수록 음악보다는 치정에 포커스가 가지만 오케스트라 내부의 모습을 꽤 세밀하게 그려냈다.

드라마 홍보 문구인 ‘전 세계 단 5%뿐인 여성 지휘자’는 클래식계에서 마에스트라의 존재가 얼마나 희소한지 드러낸다. 실제로 클래식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스웨덴의 엘프리드 앙드레(1841~1929)와 프랑스의 나디아 블랑제(1887~1976)가 포디움에 올랐지만 작곡가이자 연주자 그리고 교육자라는 특수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첫 여성 전업 지휘자는 2018년에 나온 극영화 ‘더 컨덕터’ 주인공인 미국의 안토니아 브리코(1902~1989)다. 미국인 최초로 독일 베를린 국립음대에서 지휘를 전공한 브리코는 1930년 베를린필, 1938년 뉴욕필을 지휘하는 등 주목할 만한 성취를 이뤘다. 하지만 당시 남녀차별이 워낙 심하다 보니 프로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가 되지는 못했다. 이후 미국의 사라 콜드웰(1924~2006)과 주디스 소모지(1937~1988) 같은 여성 지휘자들이 객원이긴 하지만 포디움에 꾸준히 오르면서 1990년대부터 여성이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 또는 음악감독을 맡게 됐다.

여성 상임 지휘자 시대를 연 인물 가운데 미국 출신의 마린 알솝(67)이 대표적이다. 알솝은 한국에선 2022년 임윤찬이 우승한 반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 당시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한편 심사위원장을 맡아 친숙하다. 임윤찬이 존경심을 표하기도 한 알솝은 클래식계에서 여성 지휘자에 대한 선입견을 깨부순 선구자다. 수많은 도전과 좌절 끝에 1993년 콜로라도 심포니의 수석 지휘자가 된 그는 2007년 여성 최초로 미국 메이저 오케스트라 가운데 하나인 볼티모어 심포니 음악감독에 취임했다. 2019년 보수적인 오스트리아 음악계에서 여성 최초로 빈 방송 교향악단 수석 지휘자가 됐다. 클래식계에서 여성 지휘자들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는 그는 2002년부터 재능있는 젊은 여성 지휘자들을 위한 멘토 프로그램도 진행하고 있다.

알솝 같은 선배들의 활약을 발판삼아 요즘 여성 지휘자들은 한층 두각을 드러내고 있다. 2020년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과 2022년 독일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이 각각 100년과 145년 만에 처음으로 여성 지휘자 요아나 말비츠, 옥사나 리니우에게 포디움을 내주는 등 클래식계 ‘금녀의 벽’도 잇따라 부서지고 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오페라 100년 역사상 첫 여성 음악감독인 김은선을 비롯해 노르웨이 트론하임 심포니의 상임지휘자 겸 예술감독 장한나, 뉴질랜드 오클랜드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수석 객원지휘자 성시연 등 한국 출신 여성 지휘자들도 이런 흐름에 동참하고 있다.

근래 여성 지휘자들의 활약에는 2017~2018년 세계를 강타한 미투운동의 영향도 있다. 제임스 러바인, 샤를 뒤투아, 다니엘레 가티 등 마에스트로들이 성범죄로 몰락함에 따라 클래식계가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으로 여성 지휘자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이다. 하지만 실력 없는 여성 지휘자에게 어쩔 수 없이 포디움을 내주는 것이 아니라 실력 있는 여성 지휘자들이 뒤늦게 기회를 얻은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물 역시 기대 이상이다. 여성 지휘자들의 약진은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장지영 문화체육부 선임기자 jyjang@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수집,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국민일보 신문구독
X 페이스북 카카오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