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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않는 페미니즘, 신자유주의에 포섭됐다”

‘페미니즘의 도전’ 펴낸 지 18년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 낸 정희진

그동안 정희진이 출간한 책들이다. 교양인 제공

2005년 출간된 ‘페미니즘의 도전’은 페미니즘 입문서이자 교과서로 불려왔다. 여성들뿐만 아니라 남성들도 이 책을 읽고 세계관이 찢어지는 경험을 했다고 고백했다. 이 책을 쓴 정희진(56)이 18년 만에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이란 후속작을 냈다.

지난달 30일 서울 관악구 자신의 집에서 인터뷰에 응한 정희진은 “지금까지 11권의 단독 저서를 냈다”면서 “페미니즘 책이 말만 시끄럽지 실제론 많이 읽히지 않는다”고 말했다.

“내가 쓴 책 중에 제일 잘 썼다고 생각하는 책은 ‘아주 친밀한 폭력’이다. 가장 유명한 책은 ‘페미니즘의 도전’이고. ‘페미니즘의 도전’은 30대에 박사과정을 하면서 쓴 책이다. 오랫동안 여성학 분야 스테디셀러였다고 하는데 판매 부수가 그렇게 많지는 않다. 지금까지 6만권 정도 팔렸다. 여성학이 들어가면 책이 안 팔린다.”

지난 20년 사이에 페미니즘은 한국에서 대중화되는 동시에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페미니스트들은 공격을 받는다. 페미니즘을 말하고 쓴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고 엄청난 스트레스를 동반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어렵게 쓴다고 책이 많이 읽히는 것도 아니다.

“페미니즘 책을 쓰려면 자기 검열과 피땀이 말할 수 없다. 그래서 국내 필자들이 페미니즘 책을 잘 쓰지 않는다. 쓰고 나면 또 욕을 먹는다. 남자들에게, 여자들에게, 그리고 페미니스트들에게도. 그런 상처가 크다.”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 출간을 계기로 지난달 30일 국민일보 인터뷰에 응한 정희진은 사진을 찍지 않는다며 오래 전 사진을 제공했다. 이 사진은 정희진이 지난 25년간 저술 활동을 하면서 책과 언론에 공개한 거의 유일한 본인 얼굴 사진이다. 교양인 제공

페미니즘 대중화의 최전선에 서있었던 정희진의 목소리에는 복잡한 감정이 묻어났다.

그는 오랫동안 집에서 저술 작업을 해왔다. 대학 강의와 강연을 제외하곤 외출을 거의 하지 않는다고 한다. SNS를 하지 않고 스마트폰도 최근에야 마련했다. 외부와의 연락은 주로 이메일로 한다. 모든 책을 한 출판사에서 냈고, 출판사 편집자들과 만나지도 않는다. 대면 인터뷰를 하는 경우도 극히 드물다.

정희진의 고독한 작업 방식은 강준만 전북대 명예교수를 떠올리게 한다. 관점의 변화도 비슷한 궤적을 보인다. 30대의 정희진이 쓴 ‘페미니즘의 도전’이 페미니즘의 가치를 소개하며 대중화를 모색한 책이라면, 50대 중반에 정희진이 새로 내놓은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은 대중화 이후 한국 페미니즘에 대한 성찰을 담았다. 강준만 교수도 진보진영에 대한 전투적 옹호자에서 매서운 비판자로 나아갔다.

정희진은 새 책에서 남성들의 지체된 성 인식을 비판할 뿐만 아니라 여성주의의 오류도 짚는다. ‘피해자 중심주의’나 ‘성적 자기 결정권’ 등 지금까지 여성 운동을 이끈 핵심 개념들에 이견을 제기하고, 일부 페미니스트들의 성소수자·난민 반대나 남혐 문화를 비판한다. 그는 “이제는 남성 문화뿐만 아니라 동료, 여성주의자, 여성들과 내 의견이 다른 경우가 많아졌다”고 말했다.

대중화 이후 한국 페미니즘의 문제로 정희진은 먼저 “여성학 없는 여성주의”라는 현상을 짚는다. “남녀 모두, 심지어 자신을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하는 이들조차 여성주의는 공부하지 않아도 저절로 안다고 생각한다. 여성주의는 넘치는데 여성학이 없다.” 그는 “페미니즘이 굿즈가 됐다”는 말도 했다.

공부하지 않는 페미니즘, 여성학 없는 여성주의의 대표적인 사례로 든 것은 ‘영 페미니즘’의 주된 흐름 중 하나인 ‘터프(TERF)’다. 그는 “트랜스젠더를 배제하는 생물학적 페미니즘이 터프인데, 터프가 지금 페미니즘의 대세”라며 “요즘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주의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트렌스젠더의 숙대 입학 논란 당시, 서울 소재 여대의 페미니즘 동아리 23개가 반대 성명서를 냈다. 또 내가 김건희씨를 비판했더니 페미니스트들로부터 ‘여혐’이라고 공격을 받았다. 그들은 여성들의 문제에만 관심을 둔다. 그 외 다른 문제에 대해서는 신경쓸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장애인 문제나 지방소멸 문제 같은 데는 여성이 없나? 세상에 성소수자를 반대하는 페미니즘이 어디 있나? 난민을 반대하는 페미니즘이 어떻게 가능한가?”

정희진은 공부하지 않는 페미니즘이 신자유주의에 포섭돼 버린 게 지금 한국 페미니즘의 현실이라고 진단한다. 그에 따르면 신자유주의의 무한경쟁과 능력주의, 개인주의 등은 가부장제를 무력화했고 여성들에게 성역할을 거부하고 개인화할 수 있는 틈새를 제공했다. 이런 기회 속에서 젊은 여성들이 페미니즘을 자신의 생존 전략이자 성공을 위한 논리로 전유했다는 것이다.

그는 “서울 중산층 젊은 여성들의 야망이 페미니즘을 주도하고 있다”면서 “안타깝게도 많은 여성이 신자유주의적 여성주의를 지지하고, 그것이 원래 페미니즘이라고 생각한다. 성소수자, 난민, 사회적 약자의 현실은 나중에 다룰 문제이거나 여성주의와 무관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어 “한국 사회에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논의나 고민이 너무 없었다. 힐링이나 자기개발, 치유 등 다 개인적 대응에 그쳤다. 구조적 사유를 하지 못했다”면서 “페미니즘도 여기서 나아가지 못했다. 신자유주의가 사실상 페미니즘을 흡수했다”고 덧붙였다.

페미니즘의 대중화가 가져온 또 다른 문제는 남녀 사이의 의식 불균형 격차를 더 벌려 사회적 갈등을 격화시켰다는 점이다. 정희진은 “여성들의 변화를 남성들이 모른다. 한국 남성들의 성 인식에는 굉장한 문화 지체가 있다”고 지적했다.

“극심한 성차별도 문제지만, 성차별에 대한 남녀간 인식 차가 굉장히 큰 문제다. 여성들은 이런 남성들을 설득하는 데 지쳤다. 그래서 이혼이나 결혼 기피로 간다. 남성들이 변해야 한다. 이혼율 높은 게, 결혼 안 하는 게, 가정 폭력이나 경제 문제라기 보다 가사노동 때문이다. 여성은 (직장, 가정, 육아, 돌봄 등) 이중 삼중의 노동에 시달린다. 그런데 남성들은 가정노동이 뭐가 문제인지 모르고 보려고 하지도 않는다. 한국 남성들이 진심으로 걱정된다.”

정희진은 “현재 여성의 비혼은 생존 전략에 가깝다”고 했다. 또 “여성이 아이를 낳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남성이 가사 노동을 절대로, 죽어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라며 “돌봄 노동과 재생산 노동 참여가 없다면 저출산은 지속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가 보기에 젠더 갈등이 격화되는 것은 남성들의 무지와 불안 때문이다. 정희진은 “남성들의 당황과 무지가 폭력적으로 나타나는 게 ‘이대남’ 현상”이라며 “그들의 논리가 너무 조잡하기 때문에 페미니즘에 대한 반격이라고 할 수도 없는 수준”이라고 비판했다.

“20대에서 여성들이 힘이 있어 보일 수는 있다. 신자유주의가 능력위주 사회니까 극소수 여성들에게는 좋은 직장을 갖게 했고, 일부 여성들이 취업이나 경력, 남녀 관계에서 여성성을 자원으로 활용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30대 이후의 여성들도 그런가? 젠더 갈등이 왜 중장년층에서는 격렬하지 않을까? 20대 일부 남녀의 상황이 전체 남성과 여성을 대변하는 듯 여겨지면서 착시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걸 가지고 남성들이 여성주의를 비판하고 여혐으로 대응하고 있다.”

그는 새 책에서 “페미는 새로운 레드 컴플렉스”라고 썼다. “선거 때마다 북풍이 있었다. 북한에 대해서는 이제 사람들이 무관심해졌다. 그런 상황에서 새로운 집단, 누구나 미워할 수 있는 집단이 필요하다. 그 집단이 여성이 된 것이다. 이걸 이준석이 한 번 써먹었다. 앞으로도 선거 때마다 젠더가 이슈가 될 것이라고 본다.”

그는 “페미니즘에 대한 한국 여성들의 호응은 대단했고, 여성 문제가 굉장히 크게 외화된 것도 사실”이라면서도 “그러나 당대 페미니즘이 일종의 빈 기호처럼 돼버렸다. 실제 내용이 무엇인지 설명하지 못했고 알 수 없게 돼버렸다”고 안타까워했다. 이어 “페미니즘의 대중화에 비해 여성주의 담론의 발전은 더디고, 남성 문화의 젠더 문해력은 혐오 수준에 가깝다”며 “한국 사회에서 젠더는 크게 변화했지만 그 변화를 살아내야 하는 우리는 준비가 부족한 듯 하다”고 평가했다.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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