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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일종의 멀티플렉스 극장사회”

[책과 길] 압축적 근대성의 논리
장경섭 지음, 박홍경 옮김
문학사상, 364쪽, 2만원

BTS 멤버 제이홉이 지난 연말 미국 뉴욕 타임스스퀘어에서 새해맞이 공연을 하고 있다. K콘텐츠는 한국이 갖는 압축적 근대성의 문화적 표현으로 해석될 수 있고, K콘텐츠가 세계적인 공감을 얻는 것은 압축적 근대성이 세계의 보편적인 경험이자 현실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빅히트뮤직

한국을 설명하는 말로 흔히 사용되는 게 ‘압축적 근대화’다. 압축적 근대화를 통해 경이로운 발전을 이뤘고, 압축적 근대화 때문에 사회가 미성숙하고 혼란스럽다는 식이다. 한국이 성공한 이유도, 한국이 살기 어려운 이유도 압축적 근대화로 설명하곤 한다. 그런데 압축적 근대화란 정확히 무엇인가? 압축이 어떻게 진행됐다는 것이고, 압축이 초래한 문제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장경섭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의 책 ‘압축적 근대성의 논리’는 이 질문에 답한다.

장 교수는 먼저 압축적 근대화는 한국이 전형적인 사례이긴 하지만 탈식민 세계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압축적 근대성과 그 세부 특질들은 사실 범세계적으로 광범위하게 나타나거나, 특히 동아시아 각국에서 일상적으로 관찰되며” 압축적 근대화는 경제나 정치만이 아니라 대중문화를 포함한 “광범위한 사회현상을 유의미하게 설명할 가능성”이 있다. 예컨대, K콘텐츠는 한국이 갖는 압축적 근대성의 문화적 표현으로 해석될 수 있는데, K콘텐츠가 세계적인 공감을 얻는 것은 압축적 근대성이 세계의 보편적인 경험이자 현실이라는 것을 입증한다는 것이다.


이 책이 지난해 영문판으로 먼저 출간된 것도 압축적 근대성 이론에 대한 세계 지식계의 관심을 보여준다. 앤서니 기든스가 창립하고 피에르 부르디외, 울리히 벡, 지그문트 바우만 등 최고 사회학자들의 저작을 출판해온 영국의 폴리티 출판사가 한국 학자 원작으로는 처음으로 이 책을 출간했다. 한국 사례에서 출발한 압축적 근대성이 현대 세계를 설명하는 근대성 이론으로 제출된 것이다.

장 교수에 따르면, 압축은 시간·공간 영역에서 단축(축약)과 압착(복잡화)이라는 과정을 통해 전개된다. 한국에서 시간 단축은 폭발적인 속도로 진행된 경제개발을 토대로 저임금 농업 경제에서 선진 산업경제로 옮겨간 것을 말한다. 한국과 세계와의 공간 단축은 20세기 외세 지배와 정보화, 세계화 등으로 가속화되었다. 시간은 단축되면서 압착되었는데 이로 인해 전통적, 근대적, 탈근대적 가치와 문화가 공존하게 되었다. 공간 역시 압착되어 해외·다국적·세계적 요소가 한국의 국내적·토착적 요소와 섞이게 되었다.

“과거, 현재, 아시아(한국), 서양의 가치와 이념이 병존할 뿐만 아니라 끊임없는 상호작용을 통해 새로운 요소를 만들어내는 이러한 질서는 ‘지나치게 역동적’이며 지나치게 복합적이다.” 압축적 근대화 과정을 통해 획득되는 압축적 근대성은 민족, 국가, 시민사회, 국가경제 같은 큰 단위 뿐만 아니라 도시, 공동체, 가족, 개인 등 다양한 단위에서 다양한 수준으로 관찰된다.

압축적 근대성은 여러 근대성과 근대화 주체가 공존하고 경합하는 다중근대성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한국의 경우, 식민지 시대 일본에 의해 이식된 식민지 근대성이 잔존하고, 해방 이후 주로 미국을 기준으로 한 제도주의 근대성, 개발독재시대의 국가자본주의 근대성, 신자유주의 시대의 세계주의 근대성이 공존한다. 한국인들이 자체적으로 만들어낸 유교 기반의 신전통주의 근대성, 시민 저항의 역사에서 형성된 자유주의적 민중 근대성도 나타난다.

저자는 “한국은 일종의 ‘멀티플렉스 극장사회’로의 성격을 띤다”며 “이러한 사회에서는 온갖 가능한 모든 근대성 주장들이 공격적인 방식을 통해 때로는 동시다발적으로, 때로는 순차적으로 사회라는 무대에 올려진다”고 썼다.

압축적 근대성은 문화적으로는 복합문화체제로 나타난다. 복합문화체제는 K콘텐츠의 핵심이다. “대중문화 장르에 담긴 ‘한국성’에는 한국에서 아시아, 서구, 세계 또는 전통에서 근대, 후기 근대, 탈근대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한 문명 요소들이 한국의 삶의 경험이나 감정과 어우러진 역동적인 복잡성이 있다.”

서울 마포대교 야경. 게티이미지

저자는 압축적 근대성의 문제적 측면도 조명한다. 그는 압축적 근대성은 경제생산을 극대화하느라 사회재생산을 희생시켰다며 “압축적 근대성이 압축적 (경제) 성장과 압축적 (사회) 박탈의 조합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고 말한다. 압축적 근대성은 또 가족을 사회적 인프라로 활용하며 가족의 희생에 크게 의존했다. 가족이 경제개발을 가능하게 한 노동력을 제공했고 교육을 뒷받침했으며, 복지국가를 대신해 가족 복지를 제공했다.

압축적 근대성은 근대화와 경제발전을 이룩했지만 사회재생산 위기를 초래했다. 결혼·출산 기피, 돌봄과 복지의 취약성, 인구 감소, 지방 소멸, 늘어나는 부채 등이 사회의 지속성을 위협하고 있다. 특히 가족관계가 사회적 자원으로 기능하기보다는 사회적 위험을 전달하는 통로가 될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가족 기반 사회 사회재생산이 그 어느 때보다 취약해졌다.

저자는 “한국의 사회재생산 위기의 강도와 복잡성은 모든 선진국 가운데 최고 수준”이라며 “성공적인 경제개발이 수십 년 이어진 후 이러한 경제생산과 사회재생산에 대한 불균형적 접근은 어떤 합리성이나 도구성도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고 비판한다.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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