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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당] 땅굴

태원준 논설위원


물자의 이동이 차단된 곳에서 사람들은 항상 땅을 팠다. 냉전시대 베를린장벽 밑에서는 70개 땅굴이 은밀한 왕래를 도왔고, 보스니아전쟁 당시 봉쇄된 사라예보에는 바깥세상과 이어줄 840m 땅굴이 넉 달 만에 뚫렸다. 미국-멕시코 국경에선 1990년 이후 마약 밀수용 땅굴이 180개 이상 발견됐는데,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와 이집트의 12㎞ 국경에는 그런 밀수 땅굴이 2500개나 있었다고 한다. 이스라엘의 봉쇄 속에서 땅굴은 가자지구의 삶을 지탱하는 파이프라인 역할을 했다. 2009년 가자전쟁에 파괴된 건물 6000채를 복구하려면 80년이 걸린다는 계산이 나왔었는데(봉쇄로 제한된 자재 반입량을 따져보니), 밀수 교역의 ‘땅굴 경제’는 이를 5년 만에 해냈다.

전쟁에서는 주로 군사력이 열세인 쪽이 땅을 팠다. 베트콩은 구찌터널을 팠고, 알카에다는 아프가니스탄 토라보라 동굴지대를 게릴라전에 활용했다. 시리아 반군은 알레포에서 땅굴 폭탄(적 근거지까지 땅굴을 파서 접근해 터뜨리는 폭탄)을 선보였고, 이슬람국가(IS)는 모술에 땅굴 기지를 건설했다. 하마스는 2007년 가자지구를 장악한 뒤 이집트 국경의 밀수 땅굴 노하우를 이스라엘 접경지에 접목해 테러 땅굴을 파기 시작했다. 그러다 가자시티 등 도시마다 지하철 내듯 땅굴망을 깔았는데, 총길이가 런던 지하철(400㎞)보다 긴 500㎞나 돼서 ‘가자 메트로’라 불린다.

하마스는 알레포와 모술의 땅굴 전투에서 큰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땅굴 현대화에 자원을 쏟아 부었다. 콘크리트로 안전성을, 레일을 깔아 이동성을, 전력·통신망을 구축해 효율성을 높였다. 지휘통제소를 비롯해 전투 시설을 완비한 땅굴에서, 출입구를 민간시설에 설치해 인간방패를 세운 곳에서 지금 이스라엘군을 기다리고 있다. 선제공격을 감행한 배경에는 이렇게 증강한 땅굴 전투력의 자신감이 있었을 테다. 하마스가 땅굴에 투자해온 돈을 가자지구 개발에 썼다면 주민들이 훨씬 나은 삶을 누렸을 거라고 한다. 북한 주민의 삶은 팽개친 채 핵개발에 몰두해온 김정은 정권을 보는 듯하다.

태원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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