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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열며] 탈진실 시대의 광복절 경축사

장지영 문화체육부 선임기자


최근 국내 정치와 국제 정세를 설명하는 시대적 개념으로 ‘탈진실(post-truth)’이 자주 등장한다. 탈진실이란 객관적 사실이나 진실보다 주관적 신념과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현상을 가리킨다. 2010년대 들어 영국의 브렉시트,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 유럽에서의 극우파 발호 등을 계기로 탈진실이 본격적으로 쓰이게 됐다. 영국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2016년 올해의 단어로 탈진실을 선정하기도 했다.

탈진실 현상의 배경으로는 공적 기관과 전통 미디어 그리고 전문가 집단에 대한 불신 등 여러 이유와 함께 SNS의 발달이 꼽힌다. 인터넷에서 거짓 정보와 가짜뉴스가 판을 치면서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는 것이다. 적대적 편 가르기가 심화하면서 사람들은 반대 세력을 공존해야 할 경쟁자가 아닌 제거해야 할 적으로 간주한다. 이렇게 되면 반대 세력에 대해서는 진실의 여부가 중요하지 않게 된다.

이런 탈진실 시대는 정치권의 진영 대결을 더욱 극단적이고 적대적으로 만든다. 불행하게도 민주주의 체제를 갖춘 국가들에서 공통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미국 사례를 보자.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임기 내내 거짓말을 하고 혐오·차별적 발언을 쏟아내도 공화당 지지자들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민주당을 적으로 봤기 때문이다. 결국 강성 공화당 지지자들은 트럼프 전 대통령의 대선 패배에 불복하며 미국 역사상 유례없는 의회 난입 사태를 일으켰다. 그리고 트럼프 전 대통령의 대선 결과 뒤집기 시도 등 여러 의혹과 관련한 검찰 기소 이후 미국의 정치적 분열은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지난해 9월 여론조사 기관 유고브 등의 여론조사에서 “미국 국민 절반가량인 43%가 10년 안에 내전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한다”는 결과가 발표돼 충격을 줬다.

그런데 요즘 한국 정치 상황을 보면 미국 못지않은 것 같다.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은 협치 대신 지지자들을 결집해 상대를 공격하느라 혈안이 돼 있다. 양당 지지자들이 서로에게 증오와 저주를 퍼붓는 모습을 보면 국민 갈등이 위험 수위에 달한 듯하다. 이런 가운데 나온 윤석열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는 한국 사회의 분열을 봉합하기는커녕 적대적인 편 가르기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어 무서울 정도다. 윤 대통령은 경축사에서 반공을 강조하며 현 정부에 비판적인 세력을 ‘반국가 세력’으로 못 박았다. 윤 대통령은 “공산전체주의를 맹종하며 조작 선동으로 여론을 왜곡하고 사회를 교란하는 반국가 세력들이 여전히 활개치고 있다”며 “공산전체주의 세력은 늘 민주주의 운동가, 인권 운동가, 진보주의 행동가로 위장하고 허위 선동과 야비하고 패륜적인 공작을 일삼아 왔다”고 했다.

사실 윤 대통령이 반국가 세력을 언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해 10월 국민의힘 원외당협위원장 간담회와 올해 6월 한국자유총연맹 행사에서도 언급한 바 있다. 하지만 국민 통합의 의지를 밝혀야 할 광복절 경축사에서까지 반국가 세력을 꺼낼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역대 광복절 경축사를 보면 정당과 상관없이 이전 대통령들은 국민 통합을 강조했었다.

윤 대통령 경축사에 대해 야권과 시민사회에서 거센 반발이 나온 것은 당연하다. 민주당은 “극우 유튜버의 독백” “혼자 유신시대를 사느냐”며 맹비난했다. 시민사회 역시 “전시 독재 체제에서 나올 법한 메시지” “탄압 선언”이라는 반응을 내놓았다. 윤 대통령의 남은 재임 기간 국민 갈등과 분열이 치유 불가능한 지경까지 악화되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탈진실 시대에 한국 정치의 해법은 정말 없는 것일까.

장지영 문화체육부 선임기자 jyja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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