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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당] 정당방위

한승주 논설위원


2020년 김모씨는 함께 술을 마시던 친구가 휘두른 흉기에 팔을 찔렸다. 곧바로 친구의 손을 쳐 흉기를 떨어뜨린 다음 그를 발로 걷어차 전치 5주의 상해를 입혔다. 상해죄로 재판에 넘겨진 김씨는 “흉기에 찔려 전치 6주의 상해를 입었다”라며 정당방위를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법원은 범인의 손을 쳐 흉기를 떨어뜨린 행위까지는 정당방위이나 이후 맨몸인 범인을 폭행한 것은 정당방위로 인정하지 않았다. 형법 제21조는 ‘현재의 부당한 침해로부터 자기 또는 타인의 법익을 방위하기 위하여 한 행위는 상당한 이유가 있는 경우에는 벌하지 아니한다’라고 돼 있다. 법원은 김씨가 흉기를 제거함으로써 ‘현재의 부당한 침해’ 위험이 사라졌다고 본 것이다. 지난달에는 동거남이 흉기로 위협하자 이를 뺏어 찌른 여성이 구속됐다. 남성은 생명에 지장이 없는 상태였지만 경찰은 여성을 살인미수로 검찰에 넘겼다.

서울 신림동 ‘묻지마 살인’의 공포가 채 가시기도 전에 지난 3일 분당 서현역에서 흉기 난동 사건이 벌어졌다. 인터넷에는 이를 본 딴 ‘살인 예고’ 글이 수십 개씩 올라오고 있다. 흉악범죄를 대비해 지하철역에 시민들에게 가져가라며 호신용 스프레이 박스까지 등장했다. 이런 상황에서 혹시라도 범인을 맞닥뜨릴 경우 적극적으로 대응했다가는 정당방위 인정을 못 받을 수도 있다니 황당한 일이다. 칼부림 현장에서 흉기를 빼앗는 것 외에 다른 대응을 허용하지 않는다면 범인을 제압할 수 없으니 말이다. 법정에선 정당방위를 ‘공격에 대한 방어’에 초점을 맞춰 보수적으로 적용한다. 한국이 비교적 안전한 나라라는 것을 전제로 만들어진 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세상이 달라졌다. 무심코 길을 걷다 갑자기 흉기에 찔리고, 무작정 돌진하는 차에 치여 숨지는 일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었던 시절은 가고, 옷깃만 스쳐도 무서운 세상이 됐다. 정당방위 인정 범위를 변화된 상황에 맞게 대폭 확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설득력을 얻고 있는, 흉흉한 요즘이다.

한승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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