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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샛강에서] 고독이 주는 유익

장창일 종교부 차장


정보 범람의 시대다. 각종 미디어는 물론이고 SNS까지 수많은 정보가 우리 주변에 널려 있다. 양보다 질이 중요한 게 정보라지만 쉬지 않고 쏟아지는 정보 사이에서 보물을 캐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스쳐지나가는 정보는 결국 허무할 뿐이다.

이런 정보는 현대인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지도 못한다. 혼란을 넘어 소음이 될 때도 없지 않다. 지난달 31일 새벽을 깨운 서울시의 경계경보 오발령 사례만 봐도 그렇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저서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에서 지금의 세계를 ‘유동하는 근대’로 규정했다. 그는 “유동하는 근대 세계는 항상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싫든 좋든, 알든 모르든, 기쁘든 슬프든 간에 심지어 우리가 움직이지 않고 한곳에 머물러 있으려 해도 끊임없이 여행으로 내몰린다”고 했다.

바우만은 정보의 홍수 속에 사는 이들이 무의식중에 어디론가 흘러가고 도착한 뒤 또다시 흘러가는 현실을 이렇게 꼬집었다. 쉬지 않고 업데이트되는 SNS 포스팅도 마찬가지다. 바우만은 허무함의 끝에서 고독을 누릴 기회를 놓친다고 봤다.

“결국 외로움으로부터 멀리 도망쳐나가는 바로 그 길 위에서 당신은 고독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린다. 놓친 그 고독은 바로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을 집중하게 해서’ 신중하게 하고 반성하게 하며 창조할 수 있게 하고 더 나아가 최종적으로는 인간끼리의 의사소통에 의미와 기반을 마련할 수 있는 숭고한 조건이기도 하다.”

고독의 사전적 의미는 ‘세상에 홀로 떨어져 있는 듯이 매우 외롭고 쓸쓸함’이다. 바우만은 고독을 ‘반성과 창조, 인간끼리 의사소통에 의미와 기반을 마련할 수 있는 숭고한 조건’이라고 했으니 사전적 의미에서는 다소 비껴갔지만 나름의 의미가 있다.

이와 비슷한 개념이 기독교의 ‘경건의 시간’(QT·Quiet Time)이다. 마가복음 1장 35절 말씀인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적지 않은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읽고 이를 묵상한 뒤 기도하는 QT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신앙의 깊이를 더한다. 진지한 자기 성찰은 빛과 소금으로 살라는 성경의 가르침으로 이어진다. 복잡한 삶 속에서 잠시 가지는 고독의 시간이나 경건의 시간은 나를 돌아보게도 하지만 남과 소외된 이웃을 생각하는 계기도 제공한다.

‘동물농장’ ‘1984’를 쓴 조지 오웰이 1937년 펴낸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은 탄광 지대 노동자의 비참한 삶을 기록한 르포르타주다. 1903년 영국의 식민지 인도에서 태어난 오웰은 이튼스쿨을 졸업한 뒤 명문대 진학을 하지 않고 미얀마로 떠난다. 인도 제국 경찰이 되기 위해서였지만 영국의 식민지 압제를 목도한 뒤 양심에 가책을 느껴 귀국, 런던과 파리에서 부랑자로 산다. 이 체험을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에 담은 뒤 향한 곳이 위건의 탄광 지대였다.

저자는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탄광에 기대어 사는 이들의 삶을 통해 무감각하게 사는 이들에게 경종을 울렸다.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다.

“광부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다른 세상에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구나 하고 문득 깨닫게 될 것이다. 저 아래 누가 석탄을 캐고 있는 곳은 그런 곳이 있는 줄 들어본 적 없이도 잘만 살아가는 이곳과는 다른 세상이다. 아마 대다수 사람은 그런 곳 얘기는 안 듣는 게 좋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세계는 지상에 있는 우리의 세계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나머지 반쪽이다.”

여전히 우리 주변에 있을 ‘나머지 반쪽’을 살피기 위해 필요한 건 결국 고독의 시간이 아닐까.

장창일 종교부 차장 jangc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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