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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당] 히로시마

전석운 논설위원


히로시마는 조선이 파견한 통신사가 에도(도쿄)를 가기 위해 늘 거쳤던 곳이다. 일본을 12차례 다녀간 조선통신사 행렬은 가는 곳마다 그 지역의 유행을 바꿔놓을 만큼 일본 사회의 큰 관심을 끌었다. 선진 문물을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이벤트였던 조선통신사의 방문은 한류의 원조였던 셈이다. 히로시마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조선통신사의 행렬을 2003년부터 지금까지 매년 재현하고 있다.

히로시마가 원자폭탄의 첫 공격 대상이 된 건 일본 주요 도시 중 멀쩡한 곳이 몇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1945년 3월 도쿄 대공습을 시작으로 오사카와 고베 등 주요 도시들은 열흘 만에 잿더미로 변했다. 그 해 8월 1일까지 항복하라는 요구가 묵살되자 미국은 끝내 원자폭탄을 꺼내 들었고, 히로시마를 폭격했다.

1945년 8월 6일 투하된 원자폭탄 ‘리틀보이’는 고도 580m에서 폭발했다. 인명 피해를 최대화하기 위해 설정된 높이였다. 내부 격발장치가 우라늄 덩어리에 충격을 가하자 100만분의 1초 만에 연쇄 핵분열이 일어나면서 섭씨 1000만도의 고열을 발생시켰다. 태양의 중심 온도가 1500만도인 걸 감안하면 어마어마한 에너지의 분출이었다. 하늘을 찢어놓을 것 같은 섬광, 지축을 흔드는 굉음과 함께 초속 440m의 핵폭풍이 주변 1.6㎞ 이내를 초토화시켰다. 원자탄 내부는 감마선을 내뿜으면서 빠르게 온도가 내려갔지만, 지상에 닿은 복사열은 3000~4000도에 달해 쇳물을 녹이는 용광로(1600~1700도)보다 뜨거웠다. 사망자는 14만여 명에 달했다. 피폭 후유증으로 숨진 사람까지 포함하면 20여 만명이다. 이중에는 조선인 강제징용자 3만명이 포함돼 있다.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가 1970년 세워졌다.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양국 정상으로는 처음으로 위령비를 21일 공동참배한다. 히로시마가 원폭 피해의 아픔을 딛고 고대로부터 이어온 한·일 양국 교류의 상징 도시로 거듭나기를 희망한다.

전석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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