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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샛강에서] 인류학적 상상력

박지훈 종교부 차장


기자 업무의 태반은 누군가를 인터뷰하는 일이다. 상대가 동문서답을 늘어놓으면 한숨이 나오고 기대한 답변을 들으면 가슴이 후련해진다. 가장 좋은 경우는 인터뷰를 통해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을 때다. 최근 한·미 수교 140주년을 기념해 한국교회의 젖줄이 닿은 미국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보스턴에서 만난 이영길 보스턴한인교회 담임목사도 그런 인터뷰이였다. 당시 그와 나눈 질문과 답변은 이랬다.

“미국은 한국에 복음의 씨앗을 뿌린 나라다. 그 씨앗은 지금의 한국교회가 됐고, 한국 크리스천은 다시 지구촌에 흩어져 복음을 전하고 있다. 보스턴한인교회도 그중 하나일 거다. 한국이 미국 다음가는 선교 대국이란 통계도 있다. 미국에서 체감하는 한국교회 위상은 어떤가. 세계 선교는 어떻게 이뤄져야 하나.”

“그런 질문은 이민교회가 생각하는 ‘포인트’에서 벗어나 있다. 한국이 세계 선교를 이끄는 동양의 예루살렘이 된다? 물론 그렇게 되면 좋겠지만 이민교회가 떠안은 가장 시급한 이슈는 세계 선교가 아니다. 미국 사회에서 한인은 영원한 이방인이다. 이민교회는 아시아 사람들끼리 하나가 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세계 선교는 그다음 문제다.”

그러면서 이 목사는 미국 사회의 ‘정서’를 들려주었다. 한인은 전문직에 종사해도 백인보다 훨씬 일감이 적으며, 미국 사회에 안착하려면 돈이 많아야 한다는 식의 이야기가 길게 이어졌다.

이 목사와 대화를 나누면서 생각한 것은 한국 사회에서 이주민이 겪을 것으로 짐작되는 팍팍한 현실이었다. 어쩌면 이 목사의 말은 한국에서 이주민 교회가 마주한 현실과 그대로 포개질 것이다. 알려졌다시피 한국 사회의 배타성은 심각한 수준이다. 우리는 종종 한국인 누군가가 미국이나 유럽에서 인종 차별을 겪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크게 분노하는데, 각종 데이터를 살피면 한국인의 ‘수준’도 크게 다르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여성가족부가 2015년 내놓은 ‘국민 다문화 수용성 조사’ 결과를 보면 한국인의 31.8%는 외국인을 이웃으로 삼길 원치 않는다. 독일(21.5%) 미국(13.7%) 오스트레일리아(10.6%) 스웨덴(3.5%)보다 훨씬 높은 비율이다. 지난해 발표한 같은 조사에서 국내 성인의 다문화 수용성 점수는 52.27점이었는데, 이런 점수의 배경이 된 8개 항목 중 최하점(38.76점)을 기록한 문항은 이주민과 친교 관계를 맺고자 하는 뜻을 묻는 ‘교류 행동 의지’였다. 한국인에게 외국인은 친구로 삼기엔 얼마쯤 망설여지거나 얼마간 달갑지 않게 여겨지는 상대다.

많은 전문가가 지적하는 것처럼 이주민을 보듬는 일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한국 사회가 빠르게 다문화 사회로 바뀌고 있어서다. 법무부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에 따르면 국내 체류 외국인은 2007년 100만명을 돌파했고 2019년엔 250만명을 넘어섰다. 코로나 탓에 그 수가 지난 3년 사이에 가파르게 급감하긴 했으나 코로나가 수그러들면 다시 급증할 게 불문가지다.

8박9일 출장을 통해 국민일보 취재진은 미국 동부 지역 복음의 흔적들을 살펴봤다. 차를 타고 광막한 미 대륙 곳곳을 다녔는데, 당시 떠오른 것은 최인훈의 소설 ‘화두’에 등장하는 이런 구절이었다. “자동차 여행을 하면 ‘지평선의 감각’이랄 만한 것을 맛보게 된다. 인간이 돌멩이를 들고 짐승을 쫓다가, 문득 이 초원의 한복판에 멈춰섰던 50만년 전 어느 여름 한낮이 되살아난다. 아메리카의 자연은 이런 환기력을 지닌다. 넓이란 어느 한계를 지나면 인류학적 상상력을 자극한다. 이 환기는 이 지구상의 삶이 여러 민족이 저마다 영토라는 땅 위에서 살고 있다는 처지로 볼 때 사이렌의 노랫소리처럼 유혹적이다.” 어쩌면 우리 안의 배타성을 극복하는 방법 역시 국경을 넘어서는 인류학적 상상력을 회복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박지훈 종교부 차장 lucidfal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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