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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 넷 그림, 서른 둘 연기… 은혜씨, 세상과 포옹하다

다운증후군 은혜씨와 어머니 현실씨의 ‘우리들의 블루스’

발달장애인 그림작가 정은혜(왼쪽)씨와 어머니 장차현실씨가 지난 3일 서울 상암동에서 국민일보와 인터뷰 중 눈맞춤을 하고 있다. 다큐멘터리 영화 ‘니얼굴’의 주인공이자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다운증후군 영희역을 연기해 주목받은 은혜씨와 엄마 현실씨가 지난 32년간 함께 써내려온 삶의 노래는 발달장애인 가족을 향한 응원이자 위로다. 권현구 기자

“2013년 2월 23일이었어요. 은혜가 그림을 처음 그린 게, 그러니까 24살 때예요. 그 그림을 제가 한참 봤어요. 은혜 한번 쳐다보고, 그림 한번 보고. ‘진짜’ ‘네가’ ‘이게?’ 머리끝에서부터 전율이 왔어요. 1주일 정도는 돌 맞은 느낌이었어요.”

최근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 출연한 다운증후군 배우이자 캐리커처 작가 정은혜(32)씨의 어머니 장차현실(58)씨는 딸의 그림을 처음 본 순간을 이렇게 기억했다. 그 기억은 부끄러움에 가까웠다. “사실 나 정도면 장애가 있는 딸을 편견 없이 잘 키우고 있는 엄마라고 자부했는데, 결국 나도 은혜를 장애인으로만 봤던 거예요. 내가 그림 그리는 사람인데, 은혜가 스무 살이 넘도록 그림을 잘 그릴 거라는 기대도, 생각도 하지 못했다니 충격이었죠. 나도 남들처럼 장애라는 한계 안에서 내 아이를 보고 있었구나, 그래서 그 아이만의 재능을 찾으려 하지 않았던 거구나 싶었어요. 은혜의 그림은 은혜는 물론 나도 깨어나게 한 거죠.”

‘부끄럽다’는 그의 말과 달리 현실씨의 삶은 ‘슈퍼 엄마’ 그 자체다. 장애가 있는 딸의 분신과도 같은 어머니, 동양화가이면서 ‘똘이네집’을 연재한 만화가, 장애인부모연대 양평지회장으로 발달장애 가정에 필요한 일을 알리고 변화를 끌어낸 사회운동가까지. 현실씨를 가리키는 여러 수식어 중 어느 것 하나 그냥 이뤄진 건 없었다. 30여년간 수없이 울고 좌절했지만 끝내 딸의 손을 잡고 사람들 사이에 함께 선 그를 지난 3일 서울 상암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현실씨가 다운증후군을 앓는 딸을 키우면서 꿈꿔왔던 건 하나다. 은혜씨가 자신의 힘으로, 사회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은혜씨의 그림 그리는 재능을 발견한 건 그 꿈에 한 발짝 크게 다가간 순간이었다. 사실 은혜씨가 그림을 처음 그렸던 순간 모녀는 인생의 가장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성년이 되면서 갈 시설이 없어진 은혜씨가 종일 집에서 자기 방에만 틀어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현실씨는 “다운증후군을 앓는 사람은 사회적 관계에 대한 욕구가 커요. 그런데 집에만 있게 되니 엄청난 퇴행이 왔어요. 사회 활동을 멈추니까 (스트레스가) 몸으로 와서, 시선 강박이 생기고 조현병이 생기고. 무너지는 은혜를 보면서 나도 모든 걸 내려놓게 됐죠”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런 은혜씨를 살리려고 화실로 불러냈고, 그때 그림을 만났다. 현실씨는 그림을 매개로 은혜씨를 사회로 나오게 할 방법을 찾았다. 현실씨는 “은혜가 자신 있어 하는 그림을 통해서 사람을 만날 방법을 고민할 때 떠오른 게 캐리커처예요. 사람을 만나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자, 정말 놀랍게도 무너졌던 은혜가 달라졌어요. 낫기 어렵다는 조현병까지 나아졌죠”라고 설명했다.

플리마켓에서 캐리커처를 그려온 은혜씨는 지금까지 4000명에 달하는 사람을 그렸다. 2019년엔 전시회도 열었다. 은혜씨의 그림은 단순히 사람 얼굴을 묘사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 자체가 사회와 소통하는 방법이 됐다. 이번에 출연해 화제가 된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서도 마찬가지다.

2018년 4월 청와대 효자파출소에서 전국장애인부모연대가 발달장애인 국가책임제를 외쳤다. 이때 삭발에 나선 어머니 현실씨를 딸 은혜씨가 그린 그림. 장차현실씨 제공

현실씨는 연기도 그림처럼 은혜씨를 사회와 연결하는 매개체이자, 스스로 설 수 있게 해주는 다리라고 설명했다. “은혜가 제작진 50여명의 얼굴을 모두 그려서 촬영 마지막 날 선물했어요. 감독님부터 분장실 스텝까지, 얼굴을 다 사진으로 찍어서 촬영이 있건 없건 이동할 때나 숙소에서나 계속 그림을 그린 거예요. 손가락에 물집이 잡힐 정도로. (그림 선물은) 은혜 방식대로 사람들과 관계맺기를 한 거예요. 제작진들이 그림을 받고 다 울었죠.”

인터뷰 도중 합류한 은혜씨가 드라마에서 만난 배우들과 제작진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림 선물한 이야기, 기억에 남는 장면, 한지민·김우빈 두 배우에 대해 이야기 하는 모습에서 뿌듯함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연기를 통해 더 넓고 깊은 인간관계와 사회를 경험했다는 현실씨의 말이 이해됐다. ‘앞으로 무엇을 가장 그리고 싶으냐’는 질문에 은혜씨는 “사람이 포옹하는 거(모습)”라고 답했다. 이유는 수줍은 웃음으로 대신했지만, 그림으로 사랑을 전하고 싶은 듯했다.

은혜씨는 ‘포옹’을 말했지만, 정작 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이들을 포용하지 못했다. 발달장애인을 품고 그들을 위한 목소리를 내는 건 부모들의 몫이었다. 현실씨는 은혜씨의 조현병 증상이 심해졌을 당시 모습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은혜의 눈빛이 다른 세상에 가 있는 거예요. 은혜도 이유가 있어서 이 세상에 존재할 텐데 저런 모습으로 쭉 살아야 한다는 건 너무 가슴이 아팠어요. 내가 더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그때 (내가 이룰 수 있는) 모든 걸 포기했어요”라고 말했다.

자녀가 성인이 돼도 내 삶을 전부 쏟아부어야 하는 것. 그것이 발달장애가 있는 자녀를 둔 대부분 부모의 길이다. 현실씨가 다를 수 있었던 건, 모든 걸 내려놓은 그때 은혜씨의 변화를 경험한 것이었다. 현실씨는 너무 특별해 누군가에겐 불가능처럼 느껴질 수 있는 은혜씨의 삶이 다른 발달장애 가정에 하나의 ‘가능성’이 되길 바랐다. 이를 나누는 데 필요한 건 ‘연대’였다. 그가 부모운동을 시작한 이유다.

장차현실씨와 정은혜씨가 2019년 부양의무자기준 폐지 시위에 나선 모습. 장차현실씨 페이스북 캡처

“장애인 자녀를 둔 부모들이 일하기 어려워요. 나도 (내 삶은) 포기했었죠. 그런데 은혜와 나만의 동굴에서 나와 사람들을 만나면서 가능성을 찾았고, 그 경험을 다른 발달장애인과도 나누고 싶어 부모운동을 하게 됐어요. 나오시라고, 함께하자고 그래야 산다고 얘기하지요.”

현실씨는 부모운동을 하면서 우리 사회가 얼마나 이 문제를 당사자와 가족에게 떠맡기고 있는지 깨달았다. 현실씨는 “너무 버젓이 국가가 ‘이건 당신들의 불행’이라고 규정하고 있어요. 발달장애인 케어 책임은 가족에게 있다는 부양의무제가 법으로 있었으니까요. 나도 내가 열심히 돌봐야지 했죠. 그런데 은혜가 스무 살이 넘어 청년이 되고, 직업도 없고, (시설에서 나와) 갈 곳도 없어졌는데 국가에서 딱 4만원을 주더군요. 그 순간 ‘국가는 발달장애인은 이 세상에 살지 말라고 하는 거구나’ 생각했어요. 재검을 신청해서 등급을 올리기 위해 우리가 얼마나 못났고, 허름한지 증명해야 했어요”라고 전했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얼마나 바뀌었을까. 현실씨는 “국가가 스스로 바뀐 건 하나도 없다”고 냉정하게 평가했다. 여전히 발달장애인 가정은 부모, 형제 모두가 장애아이의 삶을 함께 살아야 한다. 최근에도 발달장애와 돌봄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해 부모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일이 잇달아 발생했다.

하지만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활동 보조인 지원제도가 생겼고, 주간 활동 청년들을 위한 데이케어서비스 등도 마련됐다. 현실씨는 “발달장애인의 주간 활동 지원 서비스를 끌어낸 뒤 어떤 분이 ‘내 아이만 살린 게 아니라 나도, 삼촌도, 할머니도 ,누나도 살렸다’고 하시더라”며 “발달장애인을 둔 가족에게 장애인 한 명의 삶이 달라지는 게 그만큼 중요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현실씨는 “드라마 이후 사람들의 반응이 놀랍고 기적 같아 불안할 정도”라고 했다. 그는 “은혜는 자신을 괴물로 바라보는 외부 시선 때문에 조현병이 생겼는데, (드라마 이후) 사람들이 ‘다들 미쳤나’ 싶을 정도로 사랑해줘서 아이러니해요”라면서 “드라마가 우리 사회가 고정관념 때문에 보지 못했던 장애인의 삶을 보여줬는데, 은혜를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라 사랑스러운 존재로 소개해줬어요”라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은혜씨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니얼굴’의 포스터.

그런 면에서 오는 23일 개봉하는 영화 ‘니얼굴’은 더욱 특별하다. 은혜씨가 캐리커처를 그리며 진정한 아티스트로 성장하는 과정을 담은 영화로, 은혜씨의 아버지 서동일 감독이 찍었다. 서 감독은 3년 가까이 찍어둔 촬영본을 편집하면서 엄마 분량을 덜어내고 은혜씨에게 최대한 초점을 맞췄다. 현실씨는 “엄마를 빼버리니 은혜라는 사람이 온전히 보이는 거예요. 발달장애인의 자기 결정의 문제, 자기 삶을 주도하는 문제와 연결돼 있구나 싶었어요. 영화를 통해 발달장애가 있는 은혜가 그 자체로 빛나는 존재이고, 기쁨과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존재라는 점이 부각되면 좋겠어요”라고 소망했다.

현실씨가 3일 서울 상암동에서 진행한 인터뷰에서 지난 32년간 딸과 함께 걸어온 시간에 대해 말하며 환하게 웃고 있다. 권현구 기자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 현실씨에게 어린 은혜씨를 안고 그림을 그리러 충무로를 다니던 20대의 자신처럼, 지금도 어디에선가 그토록 애쓰고 있을 부모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냐고 물었다. 한참 망설이던 그는 “오늘 여러 번 운다”며 숨을 고르더니, 이내 가만가만 힘줘 말했다. “너무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된다고 해주고 싶네요. 괜찮다고, 조금 느슨해도 된다고. 아이에 대해서도 당신에 대해서도.”

조민영 기자 서민철 이찬규 인턴기자 mym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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