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의 나라 브라질에 ‘박동주 목사 도로’ 생긴다

31년 선교 헌신… 오르톨란지아에 복음의 탄탄대로


인구 23만4000명의 브라질 상파울루주 오르톨란지아(Hortolandia)시에 한국인 이름의 도로가 생긴다. 평범한 한국인 이름이 아니다. 10명 중 7명이 로마 가톨릭 교인인 브라질 사회에서 ‘목사’라는 수식어까지 붙은 도로명이다.

오르톨란지아시는 시의회가 지난달 17일 제랄도코스타카마르고 공공도로 사이에 위치한 길을 ‘루아 박동주 목사(Rua pastor Dong Joo Park)’로 명명하는 내용을 승인했다며 호세 나사레노 제제 고메스 시장 대행 명의로 관보에 게재했다.


이 길에 붙여진 이름, 박동주(사진) 목사는 1990년 2월 인천제2교회 부목사로 부임해 9개월 뒤인 11월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총회세계선교회(GMS) 소속 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브라질에 도착했다. 이후 31년간 브라질에서 사역하다가 지난 6월 코로나19 양성 판정을 받은 뒤 별세했다. 65세의 나이였다.

지난 26일 서울 동작구 한국세계선교협의회 사무실에서 만난 박 목사의 아내 이금숙(63) 선교사는 “남편 이름으로 도로명이 생겼다는 걸 관보를 보고 알았다”는 말과 함께, 남편이 30여년간 브라질에 닦아놓은 ‘복음의 길’을 풀어냈다.

원래 박 목사가 선교지로 마음에 품은 곳은 아프리카였다고 한다. 10년간 아프리카 선교를 위해 기도했는데 하나님은 방향을 브라질로 돌렸다.

“서운했고 하나님께 확인받고 싶었어요. 남편은 금식하며 산에서 기도했고 저는 아이들과 함께 집에서 기도했어요. 목사님은 산에서 응답받았는데 저는 못 받았죠. 금식으로 기운이 없는 남편 곁에서 성경을 읽었는데 하나님은 전도서를 통해 저에게 ‘네가 하려고 한 걸 내가 이미 받았다’고 하셨어요.”

박 목사 부부는 자녀와 함께 90년 11월 29일 브라질에 도착했다. 인구 1000만명 넘는 남아메리카 최대 도시 상파울루주의 상파울루시 부근 20여개 위성도시를 선교 사역지로 삼았다. 그리고 빈민가를 찾아 교회를 세웠다.

박 목사의 아들인 형우(37)씨는 “아버지는 못사는 동네만 찾아다니셨다. 일주일에 한 번씩 살인 사건이 발생할 정도로 험악한 지역이었다”고 말했다. 박 목사는 위험하기 그지없는 지역에 8개 교회를 개척하고 현지인 목회자를 세웠다. 과정은 쉽지 않았다.

“첫 번째, 두 번째 교회는 한국식 사역을 도입했는데 실패했어요. 가령 부교역자에게 월급을 줬더니 우리만 지나치게 의지했어요. 세 번째 교회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를 바닥으로 끌어내리셨어요. 오르톨란지아시 산타에즈메라우다에 세운 개혁장로 산타에즈메라우다교회인데 양육하던 사역자가 교인을 전부 데리고 나갔고 매주 300여명의 성도들이 채우던 예배당엔 6명만 남아 있었어요.”

박동주 목사가 브라질 오르톨란지아시 오르토공원에 네 번째로 세운 CPI오르토공원교회에서 설교하고 있다. 인천제2교회 제공

부부는 기도하기 시작했다. 이 선교사는 “성도가 늘어나는 게 우리가 잘해서 된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는 걸 하나님이 알려 주신 것”이라며 “하나님께 엎드려 회개하면서 다시 시작하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교회 이름은 CPI(국제장로교공동체)로 바꿨다. 이후 새로 개척한 교회 이름은 CPI에 지역명을 붙여 만들었다. 아픔을 준 교회가 교회 개척의 본부가 된 셈이다.

박 목사는 현지인을 향한 교육에 관심과 열정을 갖고 있었다. “남편은 못사는 사람들이 잘살려면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이 학교를 마치도록 도와줬어요.”

박 목사(앞줄 오른쪽 다섯 번째)가 CPI콩세이성교회에서 미국에서 온 단기선교팀과 전도사역을 마치고 기념 촬영한 모습. 인천제2교회 제공

상파울루 지역과 아마존 신학교에서 강의와 신학 영성 훈련을 하며 현지인 지도자 양성에도 힘썼다. 세 번째 교회를 끝까지 지킨 6명은 박 목사를 통해 신학교에 입학해 목사 안수를 받거나 교사가 되는 등 사회적 리더로 성장했다. 이들 중 한 명은 지난해 ‘박동주 목사 도로’ 인근 아만다 지역의 CPI아만다교회 담임목사로 위임받았다.

실업과 마약·알코올 중독 등으로 어려움을 겪는 가정 회복에도 힘을 쏟았다. “목사님은 무조건 도움을 주지 않았어요. 실업자에게 쌀과 생필품 등이 담긴 키트를 전달했지만 6개월 이상 지속하지 않았죠. 계속 도와주면 자립 의지가 약해진다고 생각했거든요. 도움을 주면서 전달한 메시지도 있어요. 일자리를 구해 돈을 벌게 되면 자신처럼 어려운 이들을 도우라고 하셨어요.”

그의 꾸준한 헌신에 지역 주민들은 크게 감동했다. 이번 별세 소식을 듣고는 함께 슬퍼했다고 한다.

형우씨는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브라질은 코로나19 확진자가 급증할 때라 장례식은 고사하고 사망하면 바로 묘지로 가야 했다”며 “그런데 시 의장이 ‘모른 척하겠다’며 유일하게 아버지의 장례식을 허용했다”고 설명했다.

장례식은 CPI아만다교회에서 열렸다.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교회를 찾았다. 형우씨는 “아마도 장례식 때 아버지의 삶을 기리자는 이야기가 나왔던 듯싶다”고 전했다. 가족들도 모르게 지역 주민들은 박 목사의 이름이 붙은 도로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다.

형우씨는 “도로에 아버지 이름이 붙게 됐다는 얘기를 듣고 아버지 선교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했다. 박 목사가 양육하고 세운 현지 동역자들도 그의 사역을 이어갈 예정이다. 이 선교사는 “저도 그들이 남편의 사역을 이어갈 수 있도록 도움을 요청하면 도와주고, 기도해 달라 하면 기도할 것”이라고 말했다.

서윤경 기자 y27k@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국민일보 문서선교 후원
X 페이스북 카카오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