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번방 추적기’에 힘 보탠 여성들…그 연대가 바꾼 것

[현장에서 본 2020] ① n번방 추적기 그 후

입력 : 2020-12-24 00:05/수정 : 2020-12-24 15:10
2020년 우리는 경험해보지 못한 한 해를 보냈습니다. 낯선 바이러스에 소중한 일상을 빼앗겼고, 유례없는 부동산 대란이 안정적 주거의 꿈을 앗아갔습니다. 검찰총장 징계로 치달은 정권과 검찰의 갈등은 처음 보는 광경이었습니다. 180석 거여(巨與)의 국회가 무슨 법이든 밀어붙여 만들어내는 모습은 기이하기만 했습니다. 그 현장에 있었던 국민일보 기자들이 저무는 해를 정리해보려 합니다. 더 나은 새해를 위한 복기(復棋)가 올해만큼 중요하게 느껴진 적도 없는 것 같습니다. 역시 경험하지 못했던 악랄한 범죄, 디지털 성착취. 그 n번방의 실태를 파헤친 이야기부터 시작합니다.

지난 3월 울산시청 정문 앞에서 열린 울산여성연대의 n번방 가해자·공조자 강력처벌 촉구 시위 모습. 뉴시스

‘추적단 불꽃’과 함께 거대한 디지털 성착취 카르텔을 마주한 건 지난해 여름이었다. 그 순간 목표가 명확해졌다. 쫓고, 알리고, 없애야 했다. 수개월 간 이어진 잠복과 그 안에 갇힌 피해자를 구해냈던 지난날들의 이야기는 지난 3월 국민일보 ‘n번방 추적기’(4부작)를 통해 세상에 공개됐다. 이후 분노에서 비롯된 연대가 단단했던 음지 문화를 뒤흔들었다. 우린 그동안 어떤 변화를 맞이했을까. 그리고 또 무엇을 바꿔야 할까.

불꽃과의 동행… 그 안에서 벌어진 일

그해 여름 우리가 마주한 건 지금까지는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유형의 디지털 성범죄였다. 핵심은 문형욱(갓갓·구속)이 만든 8개의 방이었다. 1번부터 8번까지 숫자로 분류돼있어 ‘n번방’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입장은 까다로웠다. 먼저 전모씨(와치맨·구속)가 운영하는 ‘고담방’을 거쳐야 했다. 공유할 만한 성착취물이 없었던 취재진은 ‘애니메이션 여아 사진으로 프로필을 변경하라’는 이벤트를 틈타 n번방 문을 열었다. 그곳엔 문형욱의 ‘노예’들이 있었다. 그의 지시에 따라 피해자들이 잔혹한 영상들은 직접 촬영해 전송하고 있었다.

조주빈(박사·구속)은 문형욱과 전씨가 모습을 감춘 9월부터 본격적으로 세력을 넓혔다. 총 4개 방을 운영한 것으로 파악됐는데, 홍보 목적의 무료방 1개와 유료방 3개였다.

피해자를 옥죄는 범행수법은 비슷했다. 조주빈이 문형욱의 범행에 영향을 받은 듯 보였다. 문형욱의 범행은 주로 트위터에서 이뤄졌다. 미성년자를 골라 경찰을 사칭해 메시지를 발송했고, 조주빈의 경우 고액 아르바이트를 미끼로 미성년자를 유인했다. 범행은 온라인 성착취에 그치지 않았다. 지난해 대구의 주차장 등에서 벌어진 성폭행 사건은 문형욱의 지시인 것으로 드러났고, 조주빈의 경우 공범들과 조직적으로 성폭행을 일삼았다.

잡아야 한다, 잡을 수 있다

성착취 피해 사실을 알리는 일은 고통을 수반했다. 지난해 10월 지인의 사진을 나체 사진과 합성해 불법유포하는 일명 ‘지인능욕방’이 활개를 치고 있었다. 그들은 친구를, 동생을, 아내를 모욕하며 더 흥분했다. 유독 심한 피해를 본 교사 A씨를 발견했다. 방장이 직접 그의 사진을 뿌리고 있었다. 연락을 받은 A씨는 의아해 했다. 인스타그램에 올린 사진이었는데, 소수의 지인만 볼 수 있는 공간이라고 했다.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특정 팔로워에게만 사진을 공개하는 기능을 활용해 범위를 좁혀 나갔다. A씨의 고등학교 졸업사진까지 유포된 상황이었기에 동창인 남성들을 용의자로 특정했다. 공개 범위를 재수정하며 사진을 올리길 반복했고, 어느 그룹에 공개했을 때 유포되는지 관찰했다. 추적 나흘째, 용의자는 두 명으로 추려졌다. 한 명만 볼 수 있도록 공개 범위를 설정해 사진을 올렸을 때 알람이 떴다. “너였구나.” 역시나 A씨의 중·고등학교 동창이었다.

n번방에 숨은 남성들

n번방 사건은 단순한 일탈이 아니다. 피해자 대부분 미성년자였고, 가장 무력한 상태에서 범행 대상이 됐으며, 스스로 가학적인 영상을 촬영했다. 이곳에서 여성은 인격체가 아닌 욕구를 분출할 수 있는 대상으로 여겨졌다. 가해자들이 여성, 그것도 미성년자를 노린 이유는 가장 약자를 찾았기 때문이다. 윤김지영 건국대학교 몸문화연구소 교수는 “무리에서 배제된 남성이 여성을 착취하는 데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텔레그램 성착취 신고 프로젝트 ReSET(리셋)도 “가해자 대다수는 현실에서 떳떳한 성취를 이뤄본 적 없는 남성들”이라고 분석했다.

방법은 처벌밖에 없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처벌 수위를 높여 경각심을 주는 것이 필요하다”며 “의제 강간 연령 상향이 아동·청소년 대상 성범죄 차단의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당시만 해도 동의 여부와 관계없이 만 13세 미만 아동과 성행위를 할 경우 처벌했지만, 보도 이후 의제 강간 기준 연령이 16세로 대폭 상향됐다.

이 교수는 또 미성년자를 유인하는 모든 행위를 처벌해야 한다고 짚었다. ‘가출한 여중생 연락 주세요’라는 글을 올리면 그 이후 행위가 뒤따르지 않아도 처벌해야 한다는 뜻이다. 보도 후 해당 제언도 반영됐다. 지난 4월 중대 성범죄 예비·음모죄를 신설하고 실제 범행까지 이르지 않더라도 준비·모의만 해도 처벌하도록 했다. 하지만 그가 강조한 잠입수사 도입은 관련 개정안이 여러 건 발의됐지만 처리는 아직이다.

지난 4월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n번방방지법’ 촉구 시위 모습. 뉴시스

시작과 끝은 ‘연대’

2018년 미투운동 그리고 2020년 텔레그램 n번방 사건까지 변화의 물꼬를 튼 건 여성들의 연대였다. ‘n번방 추적기’도 이런 연대에서 시작됐다. n번방을 끄집어낸 ‘불’과 ‘단’(불꽃의 예명)의 연대에 국민일보 취재팀이 연대했고, 보도 후 여성들의 연대가 쌓여 팽창하더니 이후 범국민적 연대가 더해져 공분으로 폭발할 수 있었다.

지칠 때마다 각자의 자리에서 n번방 사건을 규탄하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전해졌다. SNS에서는 ‘n번방 챌린지’가 이어졌고, 리셋은 가해자의 엄벌을 촉구하는 탄원서를 모았다. n번방 성착취 강력처벌 촉구시위팀 ‘eNd’는 전국 방방곡곡 가해자의 재판을 쫓아다니며 모니터링했고, ‘디지털성범죄아웃’(DSO)는 판사 42명과 함께 디지털 성범죄 가해 수법의 특징과 처벌의 한계를 논의했다.

연대의 중심에는 선 불꽃의 일상은 보도 후 통째로 달라졌다. 하루도 쉬지 않고 내달렸지만 그래도 시간이 부족할 정도였다. 최근 불꽃이 5개월간 준비한 디지털 성범죄 해결방안 제안서가 ‘제3회 새로운 경기 제안공모 2020’에 채택됐다. 앱을 통한 성범죄 대응법, 피해자 중심 단어 마련, 디지털 성범죄신고서 제작·배포 등의 내용이 담겼다.

가장 천착했던 작업은 책 ‘우리가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때’를 집필하는 일이었다. 보도 이후 대부분의 언론사에서 인터뷰 제안이 들어왔는데, 불꽃은 거의 모든 요청에 응했다. 이들의 목소리는 언론을 거쳐 대중에게 전달될 수밖에 없었기에 최대한 많은 곳에 사태를 전달해야 실체가 선명해질 거라 판단했다. 그럼에도 한계는 분명했다. 독립된 통로가 절실해졌고, 그 방법으로 책을 선택했다. 불꽃은 “n번방이라는 비극적인 역사를 답습하지 않도록 책을 통해 기록으로 남겨둬야 했다”고 말했다. 제목에서 드러나듯 이 책의 지향점 역시 연대로 모인다. 문형욱에게 쇠고랑을 채운 것도, 조주빈에게 40년형이 선고된 것도 분노가 빚어낸 연대의 힘이었다.

세상의 변화와 남은 과제들
n번방 주범 조주빈(박사)이 지난 3월 서울 종로경찰서에서 검찰에 송치되기 위해 호송차량으로 향하고 있다. 뉴시스

세상은 달라지고 있다. 보도 약 일주일 만에 붙잡힌 조주빈을 시작으로 안승진, 이원호, 수사에 난항을 겪었던 문형욱까지 줄줄이 검거됐다.

국회는 지난 4월 29일 인터넷 사업자에 불법 촬영물 유통 방지를 의무화하는 ‘n번방 방지법’, 성폭력처벌법, 범죄수익은닉규제법, 청소년성보호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이로써 단순 소지와 시청도 처벌받을 수 있게 됐다. 또 n번방 사건의 특수성을 고려해 피해자가 직접 촬영했더라도 동의 없이 유포하면 처벌하도록 했다. 하지만 개정 이후에도 불법 촬영물 유포와 단순 소지의 경우 여전히솜방망이 처벌에 그치고 있다는 점은 한계로 지적된다.

피해자 구제를 위한 움직임도 빨라졌다. 여성가족부는 피해자 특별지원단 운영을 통해 성착취물 삭제부터 개명까지 지원하고 있고, 서울중앙지검 디지털 성범죄 특별수사단에서는 피해자에게 치료비·생계비 등을 제공하고 있다.

그럼에도 악몽은 끝나지 않았다. 텔레그램에서 이탈한 가해자들은 디스코드 등 여러 곳에 새로운 둥지를 틀고 있다. ‘n번방은 판결을 먹고 자랐다’는 문구가 여성들의 피켓 구호가 된 만큼 사법부의 변화가 절실한 시점이다. 지난달 26일 텔레그램 성착취 공동대책위원회는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 조은호 변호사는 “전국 모든 법원이 최소한의 일관된 기준을 갖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법부도 손을 놓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앞서 법조계가 조주빈에게 15년형을 예상했지만, 1심에서 40년형이 선고됐다는 점은 작지만 의미있는 진전으로 평가된다. 지난 9월 15일 디지털 성범죄 양형기준안도 진일보한 변화다. 아동·청소년 성착취물 범죄의 기본 양형을 징역 5년~9년형으로 상향했고, 이를 영리 목적으로 두 차례 이상 판매한 범죄자의 경우 최대 징역 27년 3개월까지 선고하도록 했다. 2017년 아동 성착취물 관련 사건 1심 선고 중 38.5%가 벌금형이었다는 점, 디지털 성범죄 1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난 비율이 2015년 27.7%에서 올해 6월 기준 48.9%로 21.2%포인트 높아졌다는 점에 견줘보면 변화한 것은 맞지만, ‘카메라 등 이용 촬영죄’와 ‘지인능욕방’에 적용할 수 있는 ‘통신 매체 이용 음란행위’의 경우 최소 형량이 변함없이 4개월에 불과하다는 점은 과제로 남았다.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성교육의 중요성이 강조된다. 전문가들은 디지털 성범죄가 어린 연령층에서 발생한 이유는 부실한 현행 성·인권교육 시스템에 있다고 지적한다.

박민지 기자(with 추적단 불꽃) pmj@kmib.co.kr

[현장에서 본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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