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윰노트-홍인혜] 식탁의 적신호

Է:2019-12-13 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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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서 주기적 배탈 원인 찾아내… 멀리 떠날수록 알게 되는 건 오히려 나 자신


어린 시절부터 배앓이가 잦았다. 며칠 걸러 하루씩 아랫배를 움켜쥐고 끙끙거리곤 했다. 주변에서 늘 ‘장이 약한 애’로 통했다. 어른이 되고도 배탈은 주기적으로 이어졌고 이 증세는 ‘과민성대장증후군’이라는 이름으로 공식화되었다. 명칭이 생기니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이 증세는 불가사의한 나만의 특성이 아니었던 것이다. 나처럼 장이 예민한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사방에서 기름진 음식, 밀가루, 유제품, 술 등을 멀리하라는 조언이 들려왔다. 평소 이 말들을 의식하고 주의하며 살아왔지만 그럼에도 배탈은 주기적으로 나를 괴롭혔다. 그리고 나에게는 피치 못하게 저 모든 금기 식품을 떼로 마주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곤 했다.

그것은 바로 서구권 여행을 할 때다. 버터의 고소한 향을 휘감은 스테이크, 천 겹으로 찢어지는 페이스트리, 오일을 듬뿍 머금은 파스타, 구멍마다 눅진한 향을 품은 황금빛 치즈들, 그 모든 음식에 방점을 찍어주는 향기로운 와인 한 잔까지. 여행지에서의 식단은 온통 멀리해야 할 음식들의 향연이었다. 참고로 나는 외국에 나가면 현지 음식만을 먹는 타입이다. 여행 재미의 절반은 식도락인데 배탈을 염려하느라 이 모든 음식을 꺼릴 수는 없지 않은가. 혹 배탈이 나도 그때 생각하자며 나는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먹고 마셨다. 몇 날 며칠을 육류와 술, 빵과 우유만 먹고 산 적도 많다.

여기에서 놀라운 일이 발생한다. 내가 그 어떤 여행에서도 배가 아팠던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짧게는 며칠 길게는 몇 개월 이국을 떠돈 바 있었는데 신기하리만치 배탈로 고생한 적이 없다. 장이 튼튼해진 거라고 생각하자면 그건 아닌 것이, 늘 귀국해서 하루이틀이 지난 후 평소처럼 배가 사르르 아파오곤 했다. 나는 농담 삼아 이것은 ‘귀국병’이라고 불렀다. 외국에서 온갖 장에 안 좋은 음식들을 먹어왔지만 노느라 스트레스가 없어서, 혹은 고립무원이라 긴장해서 안 아프다가 돌아오면 몰아서 아픈가보다 생각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이탈리아를 떠돌며 파스타와 피자로 끼니를 줄곧 해결하다 한국 음식이 못 견디게 그리웠던 때가 있었다. 물어물어 한식당을 찾아가서 순두부찌개와 제육볶음을 시켜 먹었다. 김치와 젓갈, 오이소박이도 잔뜩 먹었다. 그러고는 바로 그날 밤부터 익숙한 배앓이가 시작됐다. 귀국병이 왜 벌써 찾아왔을까. 아랫배를 감싸 쥐고 미간을 찌푸린 채 끙끙거리는데 불현듯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설마 내 배탈의 원인이… 한식?

나는 살며 처음으로 엄마 아빠를 의심해본 꼬마처럼 평생 먹어온 음식들에 배탈의 혐의를 적용해보았다. 따져보니 정확히 말하면 한식의 문제가 아니라 ‘매운 음식’의 문제였다. 지난 모든 섭생을 돌아봐도 늘 고추가 넉넉히 쓰인 붉은 음식들을 먹으면 배가 아팠던 것이다. 외국 여행에선 매운 음식을 먹을 일이 적어 늘 장이 평온했던 것이다. 이걸 이제야 깨닫다니! 귀국해서도 나 자신을 쭉 관찰해보았는데 그 기름지다던 곱창도 구이로 먹으면 무탈, 매콤한 전골로 먹으면 배탈이었다. 밀가루 섭취도 잔치국수는 무탈, 새빨간 라면은 배탈이었다. 술자리에서도 장작구이 통닭은 무탈, 매운 닭발은 배탈이었다.

즉 내가 주의해야 할 음식들은 밀가루나 우유 같이 희멀건 녀석들이 아니라 시뻘건 녀석들이었다. 레드야말로 나에게 정지 신호였다. 한식 중엔 유독 이 적신호가 많았고 나는 이를 평생 무시해 왔기에 배탈이라는 접촉사고를 당해왔던 것이다. 이 시시한 통찰을 길게 설명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이 사건은 나에게 깨달음을 줬기 때문이다. 우선 인간은 수십 해를 건사하며 살아온 자기 몸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는 것. 평생 고질적으로 고통 받고 있는 어떤 증세의 원인이 전혀 상상치도 못했던 것일 수 있다. 어쩌면 평생 모르고 살다 갈 수도 있다.

또 한 가지의 깨달음은 여행에 대한 것이다. 먼 나라로 떠날수록 나는 더 새로운 것, 더 진기한 것을 보고 싶었다. 기왕의 나에게서 멀어지고 싶었다. 하지만 더 멀리 떠날수록 알게 되는 건 오히려 나 자신이었다. 내가 어떤 사건에 반응하는지, 어떤 도시에 매료되는지, 어떤 사람과 친해지는지. 멀리멀리 떠날수록 내 안으로 더 깊이 깊이 걸어 들어가는 것 같았다. 낯선 길을 헤매고 헤매 도착하는 곳은 바로 나였다. 생각해보라, 저 먼 이탈리아 반도에서 평생 앓아온 배탈의 이유를 찾게 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홍인혜(시인·웹툰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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