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일 경기도 안산 화랑유원지에는 아이의 손을 꼭 잡은 가족 단위 방문객들로 가득했다. 양고기 향이 은은하게 퍼지고 귓가엔 러시아어가 들렸다. 공원 한복판에 ‘고려인 문화축제’라는 팻말과 플래카드, 10여개의 행사 부스가 설치됐다.
이 행사는 이주민시민연대 사회적협동조합(대표 최혁수) 주최로, 전국의 고려인 교회와 성도들이 주축이 되어 서로 교류하고 지역 이웃과 마음을 나누기 위해 마련됐다. 고려인 교회들이 마련한 여러 부스에서는 러시아 음식인 샤슬릭과 피로시키, 러시아 음료들이 판매됐고 아이들의 옷과 장난감 등을 나누는 작은 벼룩시장도 열렸다. 공연 무대에는 고려인 청년들과 지역 교회 찬양팀이 올라 한국어 찬양과 러시아 음악, 대중가요를 연주하며 분위기를 돋웠다. 안산 꿈의교회(김학중 목사)에서 파견한 찬양팀도 무대에 올라 수준 높은 공연을 선보였다.
광장 한복판에서는 팔씨름 경연이 열렸다. 남녀 청소년과 청년들이 번갈아 팔을 맞대며 힘을 겨뤘다. 주먹을 불끈 쥐고 테이블을 잡은 채 자세를 잡는 이들 주변으로 구경하던 참가자들이 손뼉을 치며 승부를 지켜봤다. 놀이처럼 가볍게 시작된 경연은 어느새 열기를 더하며 축제 한복판을 채웠다.
현장 곳곳에선 음식과 놀이, 음악이 어우러졌지만 행사의 바탕에는 교회의 기획 의도가 담겨 있었다. 교회가 마련한 행사지만 예배나 전도 같은 종교적 성격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다. 고려인 교회들은 평소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교포들과의 접점을 넓히고 일상 속에서 신뢰를 쌓아가는 방식으로 복음을 전하고자 했다.
행사를 주최한 최혁수 이주민시민연대 대표는 “선주민과 이주민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축제의 장이 되길 바랐다”며 “문화 체험과 예술 공연을 매개로 전도 없이 교회가 먼저 다가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취지를 밝혔다.
주최 측은 참가자 수를 약 1000명으로 추산했다. 사전에 나눈 900장의 티켓 외에도 현장에서는 소식을 접한 인근 주민들이 자유롭게 찾아와 축제 분위기를 더했다. 특히 안산과 천안 경주 등 전국에서 모인 12개 고려인 교회가 주축을 이뤘다. 전국고려인동포교회연합회 회장인 돈 드미트리 안산 러시안순복음교회 목사는 “우리가 한민족임을 기억하고 이곳에서 신앙과 공동체의 정체성을 이어가고 싶다”고 바람을 전했다. 타지키스탄 출신의 고려인 3세 그는 “고려인 교회는 숫자는 적지만 언어와 문화의 장벽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고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전했다. 드미트리 목사에 따르면 현재 국내에 거주하는 고려인 중 기독교인은 약 5000명, 고려인 목회자는 200명 정도로 추정된다.
축제의 흥겨움 이면에는 고려인 사회가 여전히 마주한 현실적 고민도 존재한다. 고려인 교회를 중심으로 한 자조 활동이 점차 활발해지고는 있지만 ‘자녀 돌봄’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과제로 남아 있다. 드미트리 목사는 “경제 활동으로 인해 자녀 교육을 등한시하는 고려인 가정이 적지 않다”며 “교육은 아이들의 방치를 막고 한국 사회에 건강하게 정착할 수 있도록 돕는 가장 중요한 열쇠”라고 말했다.
이주 배경 청소년들을 위한 대안학교는 이러한 문제 해결에 적지 않은 도움을 주고 있다. 최 대표가 운영하는 안산 자이언 국제 상호문화 대안학교에는 현재 180여명의 청소년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교육과 돌봄을 받고 있다. 수업은 러시아어권과 영어권으로 나뉘어 진행되며 이 가운데 고려인 청소년이 절반가량을 차지한다.
최 대표는 “조선족은 한국 국적을 취득한 후에도 자신을 중국인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지만 고려인은 대체로 ‘우리는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이 강하다”며 “저출산과 인구 감소가 심각한 한국 사회에서 독립운동가 후손인 그들의 ‘귀국’은 환영받아 마땅한 일이고 이를 돕는 사랑의 손길이 더 해지길 바란다”고 전했다.
이날 행사에 참여한 김알료나(45)씨는 우즈베키스탄 출신의 고려인 3세로 현재 화성 남양순복음교회 사모이자 ‘리틀엔젤돌봄의집’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단기 체류를 염두에 두고 입국했지만 자녀 교육을 계기로 정착을 고민하게 됐고 한국 국적도 취득했다. 그는 “요즘은 단순한 생계보다 한국에서 어떻게 살아갈지를 고민하는 젊은 고려인들도 많다”며 “속칭 ‘이단’으로 분류된 단체들이 이주민들의 이런 필요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고 전폭적인 투자를 하고 있는 현실은 교회가 돌아봐야 할 대목”이라고 말했다.
고려인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러시아 연해주 일대로 이주한 조선인의 후손이다. 1937년 스탈린 정권의 강제 이주 정책으로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로 흩어졌고 이후 후손들이 각지에 정착했다. 2004년부터는 한국 정부가 재외동포(F-4) 비자를 본격적으로 발급하면서 약 10만명이 국내에 정착한 것으로 추산된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제조업 등 노동 현장에 종사하고 있다.
안산=글·사진 손동준 기자 sdj@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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