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살배기 어린아이부터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어른까지 저마다의 속도로 뛰었지만 마음은 하나였다. 도착선에는 경쟁도 순위도 없었다. 이웃에게 사랑을 나누는 이들의 미소만이 남았다. 교회개척운동 단체 라이트하우스무브먼트(대표 홍민기 목사)가 마련한 ‘기부 마라톤 2025 라이트업! 키즈레이스’가 그런 자리였다.
24일 서울 강남구 대치유수지체육공원. 오전 8시가 채 되기도 전부터 공원 안은 이미 인파로 가득했다. 형형색색 운동복을 입은 아이들과 손을 맞잡은 부모들, 저마다 준비운동을 하며 몸을 푸는 참가자들의 열기로 가득 찼다.
행사장 한편에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솜사탕 기계 앞에는 긴 줄이 늘어졌고, 페이스페인팅을 받은 아이들은 들뜬 표정으로 친구들에게 자랑하기 바빴다. 초코메달 만들기 체험장에도 달콤한 향이 퍼졌고, 육아상담소엔 부모들의 진지한 눈빛이 이어졌다. 단순한 마라톤을 넘어 가족 축제의 장이 펼쳐진 모습이었다.
이번 마라톤은 ‘한 걸음 달릴 때마다 희망이 자라난다’는 취지로 시작됐다. 올해 첫 회를 맞은 이 대회에는 유아부터 어른까지 온 가족이 함께 참여할 수 있도록 구성됐다. 참가비 전액은 국제구호개발 NGO 희망친구 기아대책(회장 최창남)을 통해 국내 결식 우려 아동의 식사비 지원에 사용된다. 굿러너(공동대표 예상국 이윤주)는 행사 운영을 도왔다.
마라톤은 어린이들이 뛰는 0.5~3㎞ 코스와 일반부 5㎞ 코스로 각각 진행됐다. 취지에 공감한 기자도 참가자들과 함께 5㎞를 완주했다. 그날의 현장을 전한다.
시작 전 운동장에 모인 참가자들은 준비운동을 시작했다. 요가 강사의 지도 아래 스트레칭으로 근육을 풀었다.
출발선에 선 참가자들의 얼굴은 다소 기대감이 부풀어 보였다. 사회자가 시작을 알렸다. 참가자들은 힘차게 발을 뻗었다. 구간마다 라이트하우스, 굿러너 자원봉사자들이 종을 들고 길을 안내했다. 힘내라는 격려의 말도 이어졌다. 함께 뛰던 이들도 서로에게 “끝까지 뛸 수 있다”며 응원했다. 길을 지나가던 시민들도 잠시 걸음을 멈추곤 박수와 격려를 이어갔다. “할 수 있어요”라는 응원은 땀에 젖은 참가자들에게 힘이 됐다
코스는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더러 있었다. 전날 비가 왔던 터라 길 중간중간에는 물 웅덩이도 있었다. 특히 내리막길은 아직 마르기 전이라 미끄럽기도 했다.
이날 기자의 컨디션은 말 그대로 최악이었다. 코감기로 숨 쉬기조차 버거웠고, 연골연화증을 앓는 왼쪽 무릎이 서서히 시큰거리기 시작했다. 2㎞ 지점을 지나면서부터는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둘까’라는 마음이 고개를 들 무렵, 유모차를 밀며 뛰는 백종화(38)씨가 옆을 지나쳤다. 한눈에 봐도 힘겨워 보였지만 그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 힘차게 달렸다. 그 뒷모습을 보며 이 같은 생각이 자연스레 들었다. 지금 이 발걸음이 배고픔을 참는 결식아동들에게 희망의 용기로 이어지기를 바란다고.
몸 상태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발걸음을 내디뎠다. 결국 5㎞를 완주했다. 기록은 24분 59초. 완주한 이들에겐 기념 메달을 비롯해 물과 간식이 주어졌다. 메달 뒤에는 ‘모든 발걸음이 희망을 가져다준다’(Every step delivers hope)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마지막 101번째 선수가 도착선에 들어오면서 행사는 마무리됐다.
이번 참가비로 모인 금액은 약 1000만원. 500여명의 참가자들이 함께 모은 이 정성은 결식 아동이 있는 150가정에 한 달간 반찬으로 전달될 예정이다. 라이트하우스무브먼트 이은용 목사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누군가에겐 생명의 희망이 된다”며 “이 자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살아낸 현장이 됐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날 대회에는 어린 자녀와 함께한 가족 참가자들도 눈길을 끌었다. 이형준(45)·국민주(44) 부부는 딸인 이윤솔(3)양과 함께 처음으로 마라톤에 참여했다. 부부는 “전액이 기부된다고 해서 참여하게 됐다”며 “아이가 가족과 함께하는 첫 마라톤이라 더 특별했다”고 말했다. 이어 “아이가 생기고 나니 자연히 다른 아이들도 눈에 들어오더라”며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우리가 큰 힘이 되진 못하겠지만, 이번 기회를 통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기자의 옆을 지나쳤던 백씨는 “뛰면서 나무나 풀, 풍경들을 보는 게 좋아 뛰기 시작했다”며 “아이도 이 같은 마음을 알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유모차를 끌고 이번 대회에 처음 도전했다”고 밝혔다. 이어 “기부라는 귀한 일에 함께 뜻을 더할 수 있어 좋은 시간이었다”고 했다.
트레일러너 이형모 선수도 대회에 함께했다. 그는 “기록이나 경쟁보다 나눔과 참여 자체에 의미를 두는 대회는 참가자에게도, 수혜자에게도 오래 남는 경험이 된다”며 “달리는 것만으로도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는 사실이 특별하다. 앞으로도 이런 대회가 꾸준히 열리길 바란다”고 전했다.
글·사진=김동규 기자 kkyu@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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