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0일 한국 소설가 한강이 2024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국내 언론계는 이 소식을 대서특필하는 중이며 사회 각계각층이 그녀에게 축하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국내 두 번째 노벨상 수상자이자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등장했다는 소식에 우리 문화계뿐 아니라 사회 전체가 반가움으로 들뜬 분위기다. 한강 작가의 작품세계는 현대 한국사를 짓눌러온 짙은 음영 아래에서 고통받는 피해자들의 암울한 내러티브에 주로 집중돼 있다. 그녀의 소설은 피비린내 나는 이념갈등과 엄혹한 군부독재, 그리고 열악한 여성인권의 현실 가운데서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지 못하고 무너져가는 이들의 허무감과 좌절감을 면밀하게 조명한다. 스웨덴 한림원은 한강 작가의 작품을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폭로하는 강렬한 시적 산문”이라고 평하며 수상자 선정 이유를 밝혔다.
일각에서는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이 대한민국의 높아진 문화적 역량과 위상을 증명하는 사건이라며 국가적 자긍심을 내세우는 모습도 목격된다. 대중문화 방면에서 K-컬쳐의 명성이 높아진 덕분에 순문학 영역에서도 한국 작가들의 실력이 범세계적으로 인정받을 기회를 얻게 되었다고 여기는 이들이 많아 보인다. 이는 어느 정도 사실에 근접한 추측이라고 볼 수 있다. 역대 노벨 문학상 수상자들의 국적을 살펴보면 해당 국가의 문화적 역량이나 사상적 성숙도가 글로벌 스탠다드에 부합할 정도로 올라왔을 때 수상자가 등장하곤 했던 것이 사실이다. 얼마 되지 않는 비서구권, 제3세계 출신 수상자들의 면면을 보면 그들의 작품이 서구권 문인과 독자들에게 마음의 울림을 줄 때 비로소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노벨 문학상은 작가 개인의 사상이나 필력이 출중할 뿐만 아니라 작품이 전 세계 문학계에 간과할 수 없는 영향력을 행사하기까지 해야 주어지는 상이다. 그렇게 되려면 한 나라의 문단이 작품을 영어 등 서구권 언어로 온전하게 번역할 역량이 필요하고 서구권 비평가들과 독자들이 그 나라의 문화에 충분한 관심을 갖고 있어야 한다. 한강 작가는 이미 2016년부터 2023년까지 부커상(영국), 말라파르테 문학상(이탈리아), 산클레엔테 문학상(스페인), 메디치 외국문학상(프랑스)을 수상한 이력이 있다. 즉 그녀의 글은 이미 전문적인 수준으로 서구권 여러 국가의 언어로 번역돼 있었고 그 덕분에 서구권 문인들 사이에서도 그녀의 작품에 관심을 가진 이들이 여럿 존재하고 있었다. 혹 출신 국가의 문화적 역량이 상대적으로 비성숙한 경우 수상자들은 서구권 국가 문단에 등단해서 사회적 파급력을 갖는 작품을 창작해야 했다. 2009년 수상자 헤르타 밀러(루마니아 출신, 독일 문단에서 활동), 2021년 수상자 압둘라자크 구르나(탄자니아 출신, 영국 문단에서 활동) 등이 이런 사례에 해당한다.
하나 더 짚고 넘어가자면 역대 노벨 문학상 수상자 대다수는 문학을 본업으로 삼는 이들이었지만 간혹 철학자나 정치인, 언론인, 그리고 가수도 수상자로 선정된 사례가 존재한다. 이는 스웨덴 한림원이 ‘문학’의 영역을 어느 정도 개방적으로 설정하고 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한 편의 글이 인류의 사고 수준을 높이고 절박한 윤리적 자각에 이르게 한다면 그 글의 형식에 상관없이 막대한 문학적 가치를 갖는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스웨덴 한림원이 문학작품의 윤리주의적 심미성을 노벨 문학상 수상자 선정의 핵심 기준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통상 예술의 윤리적 가치를 기준으로 삼을 때 우리는 예술활동을 크게 심미주의 예술과 윤리주의 예술의 두 범주로 구분할 수 있다. 심미주의 예술을 추구하는 이들은 작품의 아름다움으로 감성적 쾌감을 선사하는 것을 예술의 궁극적 목표로 삼는다. 반면 윤리주의 예술을 지향하는 이들은 작품을 향유하는 이들의 마음 속에 사회적 약자와 부당하게 억압받는 이들에 대한 무거운 책임의식을 새겨넣는 일을 예술의 근본 목적으로 삼는다. 후자의 범주에 속한 이들에게는 아름다움이 윤리적 메시지를 돋보이게 하는 도구로 여겨진다. 심지어 더 급진적인 경우에는 감성적 쾌감이 거의 배제된 윤리적 메시지 그 자체가 작품의 아름다움으로 지목된다. 대표적인 사례로 피카소의 ‘게르니카(1937)’를 떠올릴 수 있다. ‘게르니카’는 작품 속 인물과 동물들의 기괴한 형상 속에 전쟁의 헤아릴 수 없는 참혹함, 파시즘의 끝모를 잔인함을 새겨넣어 작품을 감상하는 이에게 쾌감이 아니라 우울하고 어두운 느낌을 선사한다. 윤리주의 예술가에게는 이 우울함 자체가 예술적 심미성으로 여겨진다.
윤리주의 예술의 입장에서 볼 때 심미주의 예술은 심각한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윤리가 배제된 예술적 심미성은 감성적 쾌감이라는 강력한 효과 때문에 쉽게 악용되곤 한다. 문학을 비롯한 여러 형태의 예술작품은 아름다운 동시에 비윤리적일 수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미국의 무성영화 ‘국가의 탄생(1915, 유색인종 차별과 KKK 미화)’, 독일 나치 부역자 레니 리펜슈탈 감독의 영화 ‘의지의 승리(1935, 나치 반유대주의 미화)’, 김동인의 친일 소설 ‘백마강(1941, 일제의 내선일체 주장 지지)’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심미주의 예술은 굳이 프로파간다에 악용되지 않더라도 그 자체만으로 예술가를 개인주의적이고 퇴폐적인 예술세계로 유도할 수 있다. 일본 심미주의 문학의 거장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 ‘가면의 고백(1949, 남성 동성애 서사)’을 대표적인 사례로 들 수 있다. 미시마가 세 차례나 노벨 문학상 유력 수상후보로 올라갔음에도 끝내 수상에 실패한 데는 아마도 그 급진적 심미주의 성향이 결정적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문학작품 속 세상에는 허구와 현실이 반쯤 뒤섞여 있다. 문학작품에 반영된 현실은 서사를 기술함에 있어 고증과 윤리의식에 관한 책임감을 부여한다. 반면 문학작품 속 허구의 영역은 작가에게 상상력과 미감 표현의 자유를 선사한다. 노벨 문학상은 전자, 즉 현실이 주는 엄중한 책임감이 중심에 자리잡은 문학작품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는 상이다. 오늘날 세계 문학의 전반적인 흐름은 순문학과 장르문학을 가리지 않고 상업성에 치중해 심미주의 일변도로 흘러가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안타까운 상황에서 그나마 노벨상이나 부커상처럼 권위있는 상이 윤리주의 문학의 중요성을 문단과 대중에게 상기시켜주고 있다. 이는 기독교적 관점으로 보더라도 바람직하고 다행스러운 일이다. 기독교 예술은 근본적으로 호교론적이면서 윤리주의적이다. 기독교 예술의 출발점이었던 로마제국 기독교 공동체들의 카타콤 벽화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계명을 따르는 선한 삶을 살도록 권고하고 그 보상으로 참예할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르치는 것을 주된 목표로 삼고 있었다. 기독교인 입장에서 예술의 원형이란 기독교적 윤리의식을 전하는 도구였으며 미감의 향유는 예술의 필수요소로 여겨지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예술의 심미성이 극한으로 발전한 상태라 예술작품을 평가할 때 그 미적 가치를 눈여겨보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적 예술 창작과 비평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로 미적 쾌감의 중요성과 영향력을 아예 무시할 수는 없는 실정이다. 그러나 문학작품을 비롯한 각종 예술작품이 선사하는 미적 쾌감이 불의, 차별, 부도덕, 방종을 방기하거나 정당화하는 방편으로 사용되는 데 대해서는 반드시 비판적인 태도를 취해야 한다. 한강 작가의 작품 속에 담긴 윤리주의적 심미성은 기독교적 관점으로 보더라도 충분히 공감하고 인정할만한 가치를 담고 있다. 무자비하고 비인간적이며 탐욕스러운 권력에 의해 짓밟힌 정치적, 사회적 정의와 인격의 존엄성을 되새겨볼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그녀의 작품은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 그리고 공의의 그림자에 대한 산문적 스케치라고 볼 수 있다.
◆박욱주 교수는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수학했고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좁은문은혜교회 목사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한국기독교문화연구소 연구교수와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정리=김수연 기자 pro1111@kmib.co.kr
GoodNews paper Ϻ(www.kmib.co.kr), , , AIн ̿